'노마(Noma)'라는 질병이 있다. 영양부족으로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걸리는 병인데, 얼굴이 부어 오르고 썩어 들어가면서 입술과 뺨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노마'는 기아의 참상을 보여주는 가장 끔찍한 단면의 하나다. 이 병에 걸린 아이들은 말 그대로 얼굴이 사라지고 만다. 기아로 인한 질병은 노마 외에도 콰시오커, 빈혈, 각기병, 괴혈병 등 수없이 많지만 못 고칠 병이 아니다. 충분한 영양만 섭취한다면 쉽게 예방할 수 있는 병이기도 하다.
유엔(UN) 최초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 8년 동안 활동한 뒤 사임한 저자 장 지글러는 "현 시점에서 전 세계의 농업 생산량은 120억 명 정도는 거뜬히 먹일 수 있다. 120억 명이면 현재 세계 인구의 두 배에 해당하는 것이니 기아는 불가항력적인 문제가 결코 아니다. 기아로 죽는 아이는 살해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며 강경하게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이 책은 저자가 식량특별조사관으로서 세계를 누비며 겪은 절망과 희망을 압축해 담고 있다. 기아 문제 전문가로서 앞서 그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탐욕의 시대''빼앗긴 대지의 꿈' 등을 출간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이번 책에서는 그간 유엔 내부 인물이었기에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인권의 한 부분으로서 '식량권'을 강조한다. 1945년에 창설된 유엔은 이듬해 세계식량농업기구(FAO)를 발족시키며 식량권 확보를 위해 노력해 왔지만 역설적이게도 식량권을 무력화하는 기구도 공존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IBRD), 세계무역기구(WTO) 등이 그것이라고 저자는 꼬집는다. 그는 자유무역과 시장주의만을 신봉하는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을 향해 "시장의 법칙은 지불 능력이 뒷받침되는 요구만 충족시킬 뿐… 시장 개방으로 피해를 입는 건 상대적으로 취약한 시장을 가진 남반구 국가들"이라고 주장한다.
책은 식량권을 지키기 위해 창설된 국제 기구의 한계와 가능성을 함께 지적한다. 또한 '녹색 금'이라 불리는 바이오연료를 만들기 위해 거대 다국적기업이 식량 재배 농지를 축소시키는 것, 식량 가격 급등을 조장하는 '식량 투기꾼'들을 기아의 새로운 원흉으로 지적한다.
절망적인 현실이지만 희망도 꿈틀댄다. 기아에 맞서는 헌신적인 국제기구 활동가와 브라질의 땅 없는 농민들의 연대, 비아 캄페시나, 기아대책 행동 등을 선례로 저자는 굶주림 없는 세계를 위한 구체적인 동참을 제안한다. 1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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