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체와 전기가 통하는 도체의 중간 성질을 가진 물질이다. 반도체는 스마트폰과 태블릿PC·세탁기·자동차 등 우리가 원하는 전자기기 어디에나 들어간다. 적절한 구조로 조합하면 D램이나 낸드플래시 등 다양한 성질의 반도체로 변한다. 권용원(53·사진) 키움증권(039490) 대표의 이력에는 항상 반도체가 따라다닌다. 권 대표는 젊은 시절 기술고시를 통과해 정부에 들어가 1980년대 한국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을 짰다.
17일 서울 여의도 키움증권 본사에서 만난 권 대표는 반도체라는 단어보다 더 어울리는 한글 단어를 찾기 어려웠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석사 과정까지 마친 후 공무원으로 정책을 짜던 사람이 증권사 대표가 됐다. 전자공학도와 증권사. 그는 서로 통하는 게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금융'이라는 전기를 집어넣어 시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권 대표를 이해하려면 키움증권에 자리하기까지의 삶을 되짚어봐야 한다. 20대에는 전자공학도, 30대는 산업정책을 짜는 공무원, 40대는 벤처기업 대표, 50대는 증권사 대표다. 십 년마다 강산이 변하는 삶을 권 대표는 살았다.
의사였던 부친의 의지에 따라 의대 진학을 권유 받았지만 그는 산업이 좋아 전자공학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석사과정을 밟던 와중에 기술고시를 거쳐 공무원이 됐다. 동기들이 대기업 기술연구 분야나 교수의 길을 갔지만 권 대표는 공직을 택했다. 권 대표는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고 공무원 생활의 시작에 대해 입을 뗐다.
"기술고시에서 5명이 붙었는데 알고 보니 제가 꼴찌였습니다. 한 문제만 틀렸으면 취업은커녕 진로도 못 정하고 군대에 갔어야 했는데 꼴등으로 합격하고 합격자 신분으로 석사장교를 했습니다. 그때는 공무원 하라는 운명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지금 권 대표의 이름 뒤에 반도체가 따라다니는 것은 공무원 생활 중 사무관으로 국내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에 뛰어들어서다. 그도 공무원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고 뒤돌아봤다.
"6메가라인 반도체 생산라인을 만드는 데 3,000억원 정도 듭니다. 기업은 당시 그만한 돈이 없었죠. 정책자금으로 정부가 빌려주는 건데 한 달에 200억원씩 적자가 났어요. 기업이 반도체로 성공하면 정부에 돈을 갚고 아니면 갚지 못하는 거였죠."
200억원은 당시 삼성전자 태평로 사옥 한 채 가격이었다. 한 달에 사옥이 한 채씩 사라졌다.
그는 "반도체는 모든 산업에 다 들어가는 '산업의 쌀'입니다. '반도체 망국론'이라는 얘기까지 들었지만 이거 안 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뛰어다녔죠. 국민 세금으로 겁나는 줄 모르고 밀어붙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권 대표는 그때부터 겁이 없어졌다고 털어놓았다. 권 대표가 이후 벤처 육성 정책을 짜는 일을 맡았던 것도 이런 배짱 때문이었다. 벤처를 담당했을 때는 뉴미디어 정책을 만들어 콘텐츠 육성 정책을 짰고 '한국·이스라엘 벤처 산업 연구재단'도 만들었다.
"만화가 이현세씨를 찾아가 애니메이션 제작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컴퓨터그래픽도 넣고 열심히 했지만 결국 망했죠. 그래도 공대 출신이라 콘텐츠 육성을 주장할 수 있었지, 당시에는 콘텐츠를 키워야 한다고 말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권 대표는 공대 출신으로 반도체와 벤처 육성, 뉴미디어와 같이 변화의 시기에 다양한 정책을 온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공무원을 그만둘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40대가 가까워지니 현장에서 뛰어보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줄 알았다.
"변화에 대한 욕구가 있었어요. 공무원으로서 변화를 시도했지만 그건 산업을 '프로모션(촉진)'하는 역할에 불과했죠.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기업에 인프라를 만들어주는 간접적인 역할을 한 겁니다. 공무원을 그만두기 5년 전부터 공대 출신 공무원으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술직에 대한 한계도 있었고 기업에서 직접 산업현장을 뛰어다니고 싶은 욕구가 컸죠."
40세 과장으로 공직을 내려놓고 권 대표가 택한 자리는 돈 많이 주는 대기업 임원 자리가 아닌 다우기술이라는 벤처 업체였다. 다우기술 부사장으로 들어갔을 때는 벤처 붐이 사그라지던 2000년대. 회사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큰 친분이 없던 김익래 다우기술그룹 회장이 직접 찾아와 "같이 한번 해보자"는 말에 출근을 결정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대기업에 가면 회장 얼굴을 얼마나 자주 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젊었을 때라 '중소기업으로 가자, 대기업은 나 말고도 갈 사람이 많이 있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이왕 나온 거 대기업은 세계로 커 나가야 하고 나 같은 사람은 벤처로 가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우기술에서 권 대표가 맡은 임무는 벤처 열풍이 사라지며 위기를 맞던 다우기술그룹의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업무였다. 그는 업계에 나온 후 벤처 버블 붕괴, 세계 금융위기, 유로존 위기 등을 겪으며 "중소기업에는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중소기업 경영전략실은 잘 짜인 대기업과는 달랐어요. TV에서 보던 대기업과 같은 인적 자원을 기대할 수 없었죠. 직접 업무를 해야 했고 거래가 있으면 직접 가서 성사시켜야 했습니다. 터보테크와 새롬 등 벤처 1세대가 망하는 위기 속에 한 5~6년 죽도록 하다 보니 '기업 경영이라는 게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디테일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늘 위기에서 벤처기업을 경영해오던 권 대표는 다우기술의 자회사인 키움증권을 맡아서도 같은 자세를 견지했다. 그래서인지 키움증권도 사상 최악의 증시 침체에도 구조조정 없이 수익을 이어가고 있다. 키움증권은 사상 최악의 증시 침체로 대부분의 증권사 수익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지난해 525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고 올해 1·4분기는 지난해(92억원)보다 영업이익이 55% 이상 늘어난 143억원을 기록했다.
권 대표는 아직 키움증권을 벤처 기업이라고 설명했다. 아니 한국의 금융투자업이 글로벌 시각에서 보면 벤처 산업이라고 이해했다.
금융위기 이후 증권과 같은 금융투자업을 '나쁜 산업'으로 생각하는 시각이 커졌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해라(Occupy Wallstreet)'라는 말도 생겼다. 하지만 우리나라 금융 산업은 골드만삭스나 JP모건 같은 수준이 아니다. 그는 "금융은 전세계적으로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는 산업으로 애플이나 삼성보다 골드만삭스나 JP모건 등 글로벌 은행이 지점을 두고 미세한 경제정보를 수집하고 제조기업 산업을 중재하며 국가 경제정책에 도움을 준다"면서 "금융위기의 상흔이 아물고 글로벌 금융사가 고부가가치를 올리며 높은 연봉의 일자리를 창출하면 그때 또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금융투자업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키움증권도 더 커야 한다고 권 대표는 생각한다. 키움증권은 2011년 인도네시아법인을 출범시키고 트레이딩 시스템 '히어로(HERO)'로 해외로도 발을 뻗었다. 또 지난해에는 6건의 기업공개(IPO)를 주관하며 업계 3위에 이름을 올렸다. 투자은행(IB) 진출 3년 만의 성과다. 권 대표는 키움만의 방식으로 해외 진출과 IB 업무를 강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키움증권은 온라인과 모바일 브로커리지(매매)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온라인 트레이딩 시스템을 이식했습니다. 대형사를 따라가봐야 백전백패합니다."
그는 "키움증권이 다우기술이라는 벤처기업에서 탄생한 만큼 중소기업이 무엇을 원하는지, IPO나 자금조달을 필요로 하는 기업의 애환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함께 사업을 풀어나갈 수 있다"며 "어떤 기업과도 대화할 수 있고 공감하고 함께 커 나갈 수 있는 키움은 젊은 회사"라고 힘주어 말했다.
● 권용원 대표는 |
밝은 표정·긍정 에너지로 당당하게 일하는 자세가 중요 ■권 대표가 말하는 인재상 |
사진=이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