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돈(블랙머니)이 주요 국가들의 경제정책에서 핵심으로 등장하고 있다. 세수를 늘리고 경제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검은 돈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국가들이 속출하는 한편 검은 돈을 국내총생산(GDP)에 포함해 국가경제 규모를 확장하는 움직임도 가속화되고 있다.
8일(현재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영국과 이탈리아·아일랜드는 올해부터 자국의 국내총생산(GDP) 집계에 지하경제 활동을 포함할 방침이다. 이는 지난 2008년 유엔에서 제시한 모범지침을 EU가 대폭 수용하며 EU 내 개별국가들에 확산되고 있는 움직임의 연장선상이다.
영국·이탈리아의 경우 지하경제 활동의 합산으로 국가 GDP 규모가 각각 0.7% 늘어나는 효과가 기대된다. 유럽연합(EU)의 통계청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이들에 앞서 GDP 책정에 지하경제를 가산하는 방식을 택한 네덜란드·핀란드·오스트리아도 3~5%가량 GDP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었다.
지하경제를 GDP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의 표면적 이유는 간단하다. "경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검은 돈이 배제된 GDP 수치는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엔 역시 2008년 지침에서 "정부가 모든 거래를 나열하지 않는다면 GDP 계정 전체가 심각하게 왜곡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당위적 설명 외에도 "일부 유럽 국가들은 경제규모를 부풀림으로써 추가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WSJ는 보도했다.
대표적인 예가 이탈리아다.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는 수십년 묵은 재정수지 불균형을 개선하기 위해 올해 재정적자를 GDP 대비 2.6%로 축소하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지하경제를 GDP에 합산하면 늘어난 GDP 파이만큼 재정지출 여력도 커지게 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선진국들의 지하경제 규모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며 "공정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같은 집계방식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실제 독일 연구기관인 노동연구소(IZA)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지하경제 규모는 2010년 GDP 대비 평균 18.3%에 육박하고 있다.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도 25%에 달한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세무당국의 손이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 거래가 이뤄져 규모를 측정하기 어렵고 이 때문에 국가부채 상황에 도움이 되는 세수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고 WSJ는 보도했다.
지하경제를 발본색원해 국가 세수를 늘리는 시도도 확산되고 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취임 후 '24시간 내 조사팀'을 꾸려 2조달러 규모의 지하경제를 색출하고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보도했다. 모디와 그의 소속당인 인도국민당(BJP)이 총선기간에 발표한 이른바 모디노믹스 공약 중 부정부패 및 검은 돈 척결을 첫 번째 이행공약으로 꺼내든 것이다. 이를 통해 가장 시급한 인도 내 인프라 시설 확대를 위한 재원마련은 물론 임기 초반 정권의 도덕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노렸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인도의 블랙 경제' 저자이자 자와할랄네루대 경제학과 교수인 아룬 쿠마는 "(모디가) 세금 회피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크고 분명하다"며 "과거의 정치인들은 이행의지가 부족했지만 모디의 경우는 (총선 결과 압도적 지지를 얻어) 다를 것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인도의 지하경제 규모는 최대 2조달러에 육박하고 있으며 이는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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