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서 가장 먼저 경험하는 시험이 받아쓰기다. 남의 말을 올바로 듣고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대인관계의 첫걸음이자 언어의 시작이니 당연한 일이다. 특히 우리의 경우에는 한글이 의성어인데다 받침이라는 독특한 언어체계를 갖추고 있어 이러한 훈련이 꼭 필요하다.
△어른들도 받아쓰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조선시대 사관들은 붓과 종이를 들고 임금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단순히 임금의 말만 기록한 게 아니라 행동, 잘잘못, 현명함과 그릇됨을 일일이 기록했다. 정조는 이를 두고 "군주는 훌륭한 사관을 두려워하고 경계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다른 경우도 있다. 조선을 비롯한 왕조시대에는 신하들이 툭하면 어전으로 몰려가 임금에게 '하교(下敎)'라는 받아쓰기를 청했다. 여기에는 긴급을 요하거나 임금의 판단을 요하는 중요한 현안들도 있었지만 자신들이 책임지기 싫거나 귀찮은 일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임금은 이래저래 어려운 자리였다.
△요즘 윗사람의 지시만 바라보는 공직자들이 부쩍 눈에 띈다. 대통령이나 총리가 주관하는 회의가 있는 날이면 비서관이나 장관들은 입 한번 뻥긋하지 않고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말씀'을 메모한다. 한자라도 놓치면 큰 사단이라도 날 것 같은 풍경이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수석비서관들에게 A4지 14장 분량의 지시를 했는데 아마도 참석자들이 진땀깨나 흘렸을 것이다. 회의가 끝나면 후속조치를 마련한다, 기자회견을 한다며 또 한번 북새통이 벌어진다. 복지부동(伏地不動)이라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까 싶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27일 정부세종청사 집무실에서 열린 간부회의에서 "받아쓰기 좀 그만하고 의견을 나누자. 정수리가 아닌 눈을 보고 회의하자"며 쓴소리를 했다고 한다. 3월에는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이 수석비서관들에게 "받아쓰기만 하고 자기 분야 일만 하는 게 정무비서가 아니다"라고 다그친 적도 있다. 스스로 일하기보다 윗사람의 뒤에 숨어서 눈치만 보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런 말까지 나올까 싶다. 현 정부에서는 아직 책임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