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을 맞아 포스트 김정일 시대에 관한 이야기로 언론이 뜨겁다. 휴전선이 바로 코앞에 있는 상황이니 당연하다 싶다. 더욱이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 도발로 남북한이 극한 대치상황에서 발생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작스러운 죽음이니 이후 북한에서 전개될 상황 변화에 대해 일반인인 나조차 궁금하기는 매한가지다.
한국, 다자통상체제 최대 수혜자
그러나 그러는 사이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일들이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난 12월 중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8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다. 153개 회원국 통상장관들이 모인 WTO 최고의사결정기구이자 세계무역에 있어 유엔총회와 같은 역할을 하는 WTO 각료회의가 이처럼 언론에 찬밥 신세가 된 적은 없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편견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번 각료회의에서 특별한 성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WTO 각료회의를 찬밥 대우하기에는 아직 우리 형편이 그리 녹록지 않다. WTO 다자통상체제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과거 우리의 통상경험이 생생히 말해준다. 미국은 지난 1988년 통상법 슈퍼 301조를 만들어 미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상대국을 중심으로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하고 보복 조치와 함께 시장 개방 압력을 가했다. 당시 우리나라도 미국의 이 같은 일방적 조치에 굴복해 우선협상대상국 지정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발적으로 농산물시장을 개방했다. 이후에도 한동안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음은 물론이다.
중국과의 마늘 분쟁은 어땠는가. 중국산 저가 마늘 수입이 급증해 우리 마늘 재배 농가의 피해를 구제하려고 수입관세를 올렸으나 중국은 곧바로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 수입을 잠정 중단하는 보복 조치를 취했다. 우리나라는 곧 바로 백기를 들고 중국으로부터 향후 3년간 수만톤의 마늘을 사주겠다는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세계 무역의 규칙을 만들고 이를 감시하는 WTO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중국 어느 누구라도 우리에게 불공정 무역 조치를 취한다면 우리도 과감히 WTO에 제소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제소해 이긴 사례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이 우리의 철강제품에 대해 내린 반덤핑 조치에 대해 우리가 WTO에 제소한 것으로 우리가 보기 좋게 승소해 미국이 반덤핑 조치를 철회했다.
이제는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WTO 회원국인 이상 정해진 룰(rule)에 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패소해 상당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 이것이 바로 힘에 의한 것이 아닌 서로 합의한 룰에 기초해 움직이는 WTO 다자통상체제이다.
보호무역 움직임 제어 힘 보태야
무역 1조달러의 통상강국 대열에 합류한 우리나라에 이러한 다자통상체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특히 세계 경제가 여전히 불황인 상태에서 보호무역주의 움직임이 확산되는 조짐을 보이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따라서 WTO 다자통상체제가 흔들리지 않고 한층 강화돼 각국의 보호조치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도록 우리가 힘을 보태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차기 WTO 각료회의를 개최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사실 GATT(관세ㆍ무역에 관한 일반협정)/WTO 체제 아래서 시장개방의 가장 큰 혜택을 본 나라가 바로 우리다. 무역 1조달러 달성을 계기로 차기 WTO 각료회의를 개최한다면 개도국의 개발이 중요 이슈인 DDA(도하 개발 어젠다) 협상의 취지에도 잘 부합한다. 다행히 차기 회의는 내년 말 개최하는 것으로만 돼 있을 뿐 아직 개최장소는 결정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WTO 각료회의가 개최되기를 기대해본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