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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워커홀릭(workaholic)이라는 말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성실함과 치열함을 표상하는 단어였습니다. 성공하려면 일에 중독돼야 하고, 끊임없는 자기 성취욕과 관리력으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믿음이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인사 소식이 들려 올 때마다 한 두 사람 씩은 ‘열심히 일한다’ ‘꼼꼼하다’는 이야기가 하마평을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것이 바람직한 현상일까요.
유명한 사회학자이자 사상가인 막스 베버(Max Weber)가 자신의 저서에서 기막힌 말을 했습니다. ‘이 지구의 핵심부에서 마지막 석탄을 캘 때까지 관료제는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관료제라는 쇠창살(Iron Cage)에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인류가 개발한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과학적 관리법(Scientific management), 즉 관료제에 입각한 성실하고도 합리적인 업무 문화가 가지는 단면을 정확히 꿰뚫은 것입니다. 제일 먼저 앞장서서 관료제론이라는 체계를 만들었던 그가, 시스템 자체가 갖는 모순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면서 통찰력 있는 관점임에 틀림없습니다. 17세기 영국의 형식적이고 허례허식적인 행정 절차를 비판하면서 생겨난 말인 ‘레드 테이프(Red Tape)’ 현상도 주목할 만 합니다. 원래 공문서를 봉할 때 사용되었던 붉은 테이프가 의사결정자의 상징이었던 시절을 빗댄 것이죠.
일련의 현상 이면에는 일하는 기분을 즐기는 조직원 특유의 정서가 숨어 있습니다. 창의성 연구자들은 새로운 생각을 하도록 격려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일(Task)이 있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는 문화를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특히 동양적인 정서를 지닌 연공서열 문화, 상명하복 체계가 자리잡힌 조직에서 이런 경향이 종종 생겨납니다. 시스템에 의해 개인이 극도로 소외되어 있는 상황에서 직원 개개인들은 정말 조직에 도움이 되는 일보다는 역할을 마무리하는 데 바쁘기 쉽습니다. 얼마 전 현대카드의 정태영 사장은 몇 달간 회사 안에서 파워포인트로 문서를 기안하거나 발표하지 말라고 지침을 내리기도 했죠. 문서를 통해 전달되는 실제 아이디어와 의사결정 포인트가 아니라, 자료의 서식과 절차에만 익숙한 직장인들의 관성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모르는 소리,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며 항변할 이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말단 직원이라면 일이 끝나도 제때 퇴근하지 못하고 상사의 눈치만 봤던 경험이 한두 번 쯤은 있기 때문이죠. 얼마 전 정계 은퇴를 선언한 손학규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은 ‘저녁이 있는 삶’을 2012년 대선 때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많은 직장인의 공감을 얻기도 했습니다. ‘여유 있고 조화로운 삶’을 꿈꾸지만 그저 꿈으로 밖에 남길 수 없는 직장인의 서글픈 현실에 대한 반증인 셈입니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한다는 이야기가 미담처럼 전해지는 직장은 ‘일하는 기분을 즐기는’ 곳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휴가 중에도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을 수 없으신가요? ‘내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아’란 지나친 걱정과 우둔함 때문일 수도, ‘시도 때도 없이 전화로 질문을 퍼붓는 상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어느 쪽도 환영할 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얼마 전 평범한 직장인의 표상을 자처하는 한 친구에게 ‘야근 지양 정책’이 ‘시력 저하 지향’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들었습니다. 불필요한 야근을 막는다며 저녁 몇 시 이후로는 사무실이 일괄적으로 소등되는 상황을 빗댄 말입니다. 남아서 일하고 주말에도 일하는 게 꼭 필요한 경우도 있겠지요. 하지만 당연한 것처럼 매번 반복된다면 올바른 상황은 분명 아닙니다. 치열하게 일해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습니다. 단, 정규 업무시간에 한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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