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의 등산가들이 밧줄 하나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리스가 추락하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도 함께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존 래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메릴린치 스트래티지스트는 그리스발(發)로 또다시 불거진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위기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지난해 4월 그리스를 시발점으로 불거진 유로존의 재정위기가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며 세계 경제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1년여에 걸친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수습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로존은 매번 환부를 달리하며 반복되는 재정위기 사태에 시달리고 있다. 이번에는 그리스에서 촉발된 위기가 유로존 4대 경제대국인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순식간에 시장을 뒤덮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3일(현지시간) 익명의 채권 거래인의 말을 인용해 "스페인이 (유로존과) 디커플링돼 있다는 판단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며 "스페인 국채가 대거 매도되면서 시장 분위기는 참담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날 스페인의 10년 만기 국채와 유로 채권시장의 벤치마크 대상인 독일 국채의 수익률 차이(스프레드)는 2.61%포인트까지 벌어져 지난 1월 이래 최대치를 기록했다. 투자자들이 그만큼 스페인 국채에 대한 투자를 꺼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0.46%포인트 오른 17%까지 치솟아 독일 국채와의 스프레드가 14%포인트에 달했다. 유로존이 지금까지 구조적인 취약점을 묻어둔 채 그때그때 고비를 넘겨왔지만 살얼음판과 같은 재정상태로 시장은 유로존의 사소한 악재에도 요동을 치는 것이다. 이번에는 20일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이탈리아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추고 주말에 열린 스페인 지방선거가 집권당의 참패로 끝나면서 스페인 재정개혁의 추진력에 대한 우려가 고조된 점이 유로존 위기 확산의 도화선이 됐다. 하지만 유럽위기가 반복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보다도 각국의 채권이 서로 얽히고 설켜 있어 한 나라의 위기가 사방으로 전이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현재 재정위기국인 포르투갈에 대한 익스포저는 스페인이 1,086억달러로 전세계에서 압도적으로 많다. 유로존 4대 경제대국인 스페인에 대한 익스포저는 독일(2,424억달러) 못지않게 프랑스(2,247억달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는 그리스에 대해서도 유로존 가운데 가장 많은 920억달러의 익스포저를 보유하고 있다. 단일통화를 사용하면서 복잡하게 채권이 맞물려 있는 탓에 어느 한 국가에서 발생하는 악재는 곧바로 각국으로 '도미노 효과'를 일으키며 유로존 재정위기 우려를 수면 위로 끌어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경제발전 속도로 엮인 유로존을 통합시킬 정치적 리더십 부재도 반복되는 유로존 위기의 고질적 요인으로 지목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3일 "그리스 재정위기를 둘러싼 유럽중앙은행(ECB)과 유로존 정부들 사이의 이견이 유럽 채권문제를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FT도 유로존 금융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주요국들에서 나타난 정치적 공백을 가장 큰 리스크로 지적했다. S&P가 이탈리아 신용등급 전망을 낮추고 이어 피치가 23일 벨기에의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한 것 역시 모두 정치적 불안정을 이유로 든 것이었다. 여기에 유럽 경제회복에 대한 기대감도 본격적으로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마킷이코노믹스에 따르면 유로존의 5월 서비스업ㆍ제조업 구매관리지수(PMI)는 전월 대비 2.4포인트 하락한 55.4로 7개월 만에 최저 수준에 그쳐 역내 경제 회복속도가 둔화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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