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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한 폭의 그림이 두툼한 철학 서적 못지않은 깊은 깨우침을 전할 때가 있다. 서울 삼성동 인터알리아에서 열리고 있는 '사이클, 리사이클(Cycle, Recycle)'전이 그렇다. 자연의 순환과 소멸ㆍ재생을 주제로 작가 12명의 작품 100여 점을 모은 전시다. 사진작가 구본창은 쓰고 남은 비누들로 '비누' 연작을 촬영했다. 닳아서 납작해지고 갈라진 비누는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을 거쳐 시간 속 변화의 과정을 담아냈고 마치 색색의 보석처럼 다시 태어났다. "쓰다 남은 비누 사진은 제각각 삶을 살아낸 사람들의 얼굴을 닮았다"는 작가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노자와 장자의 동양사상을 공부해 온 오수환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순환을 단순한 선, 서예의 필치 같은 힘찬 획으로 표현했다. 연마 끝에 터득한 순간적인 붓질의 작품 '변화(Variation)'가 긴 여운을 남긴다. '구름'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강운이 이번에는 물에서 화두를 끄집어 냈다. 신작 '순수형태-물 위를 긋다'는 아크릴 판 위에 화선지를 놓고 단 한번의 붓질로 완성한 작품이다. 맑은 파란색이 아크릴 판과 한지 사이를 지나며 기포를 만들었고 이는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로 화면에 흔적을 남겼다. 도윤희는 가장 푸르렀던 시절을 지나 쇠락하는 식물을 통해 '그럼에도 지속되는 아름다움'을 그렸다. 자연의 순환에 순응한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임을 의미한다. 가는 구리선을 엮어 나뭇잎과 항아리 등을 만드는 정광호는 형태는 보이지만 손에 잡히는 덩어리감은 없는 작품을 통해 존재감에 대해 되묻는다. 버려진 필름으로 삼라만상의 만다라를 표현한 김범수를 비롯 박성실ㆍ정주영ㆍ박신혜ㆍ홍수연ㆍ이경민ㆍ장재철의 작품 곳곳에 세상의 이치가 깃들어 있다. 22일까지 열린다. (02)3479-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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