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이 만난 사람] 조석준 기상청장 "정전대란은 소통부재가 낳은 人災…경계 허문 융합행정 필요""우리나라의 기상청 수준은 축구로 치면 영국 프리미어리그 수준" 인터뷰-한기석 사회부장 hanks@sed.co.kr 정리=나윤석기자 nagija@sed.co.kr 늦더위 정보 제공했는데도 따로따로 행정이 피해 키워 지역 기상담당관제 내년 시행… 지자체와도 긴밀히 협력할 것 한·중·일 수치예보 워크숍 등 동북아 기상재해에도 공동 대응 '웨비게이션' 1년내 상용화… 민간과의 융합도 활발히 추진 지난 15일 대한민국이 암흑에 잠겼다. 두 달 전 투하된 '물폭탄'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정전'이라는 뒤통수를 또 한번 얻어맞은 것이다. 기상청이 때아닌 늦더위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예보했음에도 이를 간과한 당국이 전력수요를 잘못 예측하면서 유례없는 정전사태가 벌어졌다. 책임의 경중을 떠나 기상청과 정부의 소통 부재가 낳은 인재(人災)였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었다. 날씨를 관측하고 예보하는 기상청의 업무가 얼마나 우리 일상에 밀착돼 있는지 국민들은 절감했다. 최근 만난 조석준(사진) 기상청장은 이번 사태의 원인 중 하나로 정부 간 소통 부재를 꼽았다. 그는 "늦더위 정보가 이미 각 부처에 제공됐는데도 이 정보가 정부 정책에 반영되지 못한 것은 기상정보의 중요성을 간과한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정부 간 소통과 융합행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결국 정전사태를 불렀고 각 기관이 따로 놀 듯 우왕좌왕하며 국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는 학계에서 통섭이 활발하듯 정부 부처와 공공기간 역시 융합을 통해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8월31일 기획재정부 주최로 열린 경제정책조정회의에 조 청장이 참석해 이상기후 현상과 재난방지 방안 등을 얘기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였다. 조 청장은 "기상청이 경제정책조정회의에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부처 간 장벽을 허물 수 있는 통로를 지속적으로 마련하기 위한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융합행정에 대한 조 청장의 목표는 서서히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조 청장은 "현재 기상청이 구축하고 있는 범정부적 레이더 공동활용 체계는 국방부(9대), 국토해양부(7대), 기상청(11대)의 레이더를 함께 운용함으로써 관측 사각지대를 없애는 데 성공했다"며 "이 때문에 정부예산도 1,600억원이나 절감했다"고 설명했다. 기상청의 범정부적 레이더 공동활용은 정부 부처에서 시행하고 있는 연간 2,500여개의 업무협력 체결 가운데 인천공항 출입국 서비스와 연말정산 간소화 시스템과 더불어 제26차 국가경쟁력위원회에서 대표적인 융합행정 우수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기상청은 지방자치단체와도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역 기상담당관' 제도를 내년부터 본격 시행할 예정이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지역 기상담당관은 기상대가 없는 전국의 시·군에 파견돼 자치단체장의 '기상 멘토' 역할을 수행하면서 정책 판단을 돕게 된다. 조 청장은 "기상청과 지자체 간의 융합행정을 통해 효율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봐달라"며 웃었다. 융합에 대한 조 청장의 욕심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상청은 9월 초 동북아시아 지역의 기상재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한중일 수치예보 워크숍'을 개최했다. 이번 워크숍에서는 첨단 관측 자료의 분석기술과 슈퍼컴퓨터를 활용한 최신 수치예보 기법들이 소개됐다. 조 청장은 "지난해 한일 양국 기상협력회의에서 우리나라가 처음 제안해 3개국의 워크숍이 성사됐다"며 "앞으로 매년 돌아가면서 순환 개최할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이뿐만 아니라 기상청은 필리핀의 위험기상 대응능력 향상을 위해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협력해 300만달러 규모의 '필리핀 재해방지 조기경보 및 대응시스템 구축'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2007년과 2008년 기상청은 이미 필리핀 4개 지역에 안정적인 재해경보 시스템 구축을 지원한 바 있는데 필리핀이 한 단계 발전한 형태의 재해 예·경보 시스템 구축을 우리 정부에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그 일환으로 필리핀 기상청의 수문전문가 5명이 19일부터 2주 과정의 홍수 예·경보 시스템 교육을 한국에서 받고 있다. 조 청장은 "40여년 전 장충체육관을 지어줬던 필리핀과 한국이 이제는 위치가 뒤바뀌었다"며 "베트남과 몽골의 기상 현대화 사업도 함께 추진 중"이라고 귀띔했다. 조 청장이 생각하는 한국 기상의 취약점은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의 균형이다. 그는 "기상청 업무와 기상산업의 역할은 확실히 구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상청이 황사ㆍ태풍ㆍ집중호우ㆍ폭설 등에 대한 정확한 기상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위한 인프라 구축에 역량을 집결하면 민간 부문은 각 기상정보 수요자가 필요로 하는 맞춤형 기상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골프를 치는 사람과 수영을 즐기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정보가 같아서는 안 됩니다. 녹색성장을 위한 기상과 기후변화대책 등 국가기상업무를 맡는 기상청과 다양한 맞춤형 서비스로 승부하는 민간산업이 양대 축으로 균형을 이룰 때 우리나라가 진정한 기상강국에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기상청과 민간의 융합을 위한 첫 단추로 조 청장이 고민하고 있는 아이디어는 '웨비게이션(wevigation)'이다. 자동차 내비게이션(navigation)과 실시간 날씨정보(weather)를 결합한 것으로 조 청장이 직접 만든 말이다. 조 청장은 "이동경로에 따라 날씨 서비스를 제공하는 웨비게이션의 상용화를 이르면 1년 안에 이룬다는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며 "우면산 산사태와 같은 집중호우가 발생했을 때 강남구에 시간당 100㎜ 이상의 비가 쏟아지고 있다는 정보를 운전자들이 접할 수 있다면 그만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표현대로 날씨정보가 더 이상 '예보(forecast)'가 아닌 '실보(nowcast)'의 형태로 제공되는 시대를 맞은 것이다. 언론인 출신답게 조 청장의 화법은 인터뷰 내내 거침이 없었다. 자랑거리가 있으면 겸손한 척 숨기지 않았고 섭섭한 부분은 애써 덮어두지 않았다. 여러 가지 사업 구상으로 조 청장의 머릿속은 지금도 쉴 틈이 없지만 어느덧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우뚝 선 기상청에 대한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2009년 세계기상기구(WMO)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수치예보 모델의 예측성능을 기준으로 한국은 미국과 영국 등에 이어 세계 7위 수준에 올라 있다. 조 청장은 "위험한 날씨를 예측하는 예보적중률과 강수 유무에 대한 예보정확도는 공히 90%에 이르고 있다"며 "전세계의 구석구석을 빼놓지 않고 예보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을 제외하고 전세계에 12개국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았기 때문일까. 올해 5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16차 WMO 총회에서 조 청장은 4년 임기의 집행이사로 선출됐다. 2007년 제15차 총회에서 한국이 처음 당선된 후 재선에 성공한 것이다. WMO 집행이사회는 각종 사업과 예산을 총괄하는 기구로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와 같은 역할을 한다. 조 청장은 "189개국의 WMO 회원국 중 의장단 4개국과 당연직 6개국을 제외하고 179개국이 선출직 27개 집행이사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며 "104표를 획득한 한국이 각각 100표와 55표를 얻은 인도와 이란을 제치면서 집행이사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번 당선은 한국이 보여준 기상기술 수준을 국제적으로 다시 한 번 인정받은 결과이자 끈질기게 펼쳐온 기상외교의 결실"이라고 조 청장은 자평했다. 그러나 기상청이 이만한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지난 우면산 산사태와 같은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매서운 비난만 쏟아낸다. 조 청장은 섭섭한 마음을 숨김없이 토로했다. "동네 축구와 고급 축구는 그저 볼만 따라가느냐, 아니면 공간을 활용할 줄 아느냐의 차이에서 갈립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상청 수준은 축구로 치면 영국 프리미어리그 수준에 근접해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패스 미스 몇 개 난 부분에만 눈을 부릅뜨니까 청장으로서 아쉬운 마음이 있습니다." 1896년 6월 일본 산리쿠 해역의 지진과 올해 3월의 일본 대지진을 비교해보면 최근 발생한 대지진이 6배나 강도가 컸음에도 사망자 수는 거의 비슷했다. 인명피해를 이만큼 줄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결국 기상기술과 방재대책의 발전이었다. 조 청장은 "2008년 아사히신문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기예보에 대한 일본 국민의 신뢰도가 94%나 된다"며 "가족 다음으로 신뢰받는 대상이 기상청이라고 말하는 일본이 가끔 부럽다"고 전했다. 대화 말미에 한반도 기후변화 얘기를 꺼내자 조 청장의 표정이 다소 굳어지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날씨는 사람의 기분과 같아서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고 기후는 잘 변하지 않는 성격과 비슷하다. 조 청장은 "지난 수천 년간 일정한 흐름을 보이던 기후가 최근에 급격한 변화를 보이면서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더욱이 한반도 주변은 전 지구 평균 기온의 상승보다 1도 더 높은 변화가 예상된다"며 "태풍 역시 예전보다 강력한 상태로 한반도 주변을 덮치고 있는 상황"이라고 걱정했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백두산 화산 폭발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학자마다 견해 차이가 워낙 심해 단정하기가 힘들다는 것. 그러나 조 청장은 발생 가능한 여러 시나리오를 상정해 확실한 대비책을 세우겠다는 의지만큼은 확고했다. 그는 "천리안 위성 자료가 기후ㆍ환경재해ㆍ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는 기술을 확대 개발하고 한국형 수치예보 모델을 오는 2019년까지 개발하겠다"고 약속했다. 학교도…병역도…일도 38년간 늘 날씨와 함께 ■조 청장은 기업·협회·정부 넘나든 올라운드 플레이어 트위터 등 SNS 강화…젊고 빠른 기상청 이끌어 참 오래도 했다. 조석준 기상청장의 삶은 1973년 서울대 기상학과에 입학한 이래 지난 38년간 언제나 날씨와 함께였다. 대학 졸업 직후 기상장교로 군복무를 마쳤고 1981년 KBS에 국내 1호 기상 전문기자로 입사했다. 회사를 그만둔 2001년까지 20년간 '국민 기상캐스터'로 유명세를 떨쳤다. 이후 정부와 협회ㆍ기업을 넘나드는 '올 라운드 플레이어'로 활약했지만 단 한번도 날씨와 멀어진 적은 없었다. 솔직히 지겹지 않느냐고 묻자 "타이거 우즈가 평생 골프채를 내려놓을 것 같냐"는 답변이 곧바로 날아왔다. "오랜 연륜과 경험이 쌓이고 쌓여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전문가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조 청장은 연륜을 강조했지만 사실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그 누구보다 젊은 수장이다. 인터뷰 내내 그의 손가락은 아이패드의 터치스크린을 이리저리 넘기느라 쉴 틈이 없었다. 영상과 그래픽이 조화를 이룬 조 청장과의 대화는 인터뷰라기보다 능숙한 연사가 진행하는 프레젠테이션에 가까웠다. 조 청장의 뉴미디어에 대한 관심은 기상청이 시대흐름에 발맞춰 젊은 조직으로 거듭나는 발판이 됐다. 지난 2월 조 청장이 취임한 이래 기상청은 페이스북ㆍ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강화했다. SNS를 통한 기상청의 실시간 정보제공은 일본 대지진 이후 방사능 유입 가능성에 대한 온갖 허위사실이 인터넷을 떠돌 때 국민들의 불안심리를 잠재우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 청장은 체력도 남다르다. 젊은 시절부터 그가 즐기는 운동은 축구다. 전국 기자축구대회에서 5골을 넣으며 만년 예선 탈락 1순위였던 KBS를 우승시켰던 사회 초년병 시절을 회고하며 조 청장은 "사실 언론 바닥에서 기상보다 축구를 잘하는 친구로 먼저 알려졌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축구로 다져진 체력은 환갑을 바라보는 오늘에도 열정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일정을 소화하는 데 있어 그에게는 주말이 따로 없고 밤낮이 중요치 않다.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몇 날 며칠씩 밤을 새우고도 끄덕없는 조 청장을 보며 부하 직원들은 혀를 내두른다. 기상학이라는 분야가 생소했던 1970년대 초반 조 청장은 날씨를 분석하고 연구해 미래를 예측하는 학문의 특성에 매료됐다. 이후 근 40년을 날씨만 생각하며 살아온 그에게 마지막 바람을 물었다. "기상자료 앞에서 인종이나 국가의 차이는 무의미합니다. 일기예보는 인류가 만든 최고의 합작품입니다. 전세계가 함께 자료를 관측하고 교환하며 공존하는 세상을 꿈꿉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어쩔 수 없이 날씨맨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약력 ▦1954년 충남 공주 ▦1977년 서울대 대기학과 졸업 ▦1977~1981년 공군 기상장교 ▦1981~1984년 한국방송공사(KBS) 기상전문기자 ▦1985~1987년 코카콜라코리아 홍보마케팅 과장 ▦1987~2001년 KBS 기상캐스터 ▦1994~1995년 농림부 기상자문역 ▦1999~2001년 웨더뉴스채널 부사장 ▦2005~2009년 한국기상산업진흥원 이사 ▦2006~2009년 한국기상협회 자연재해예방포럼 사무총장 ▦2008~2010년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지속경영교육원장 ▦2011년 2월~현재 제9대 기상청장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