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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2월5일 오전9시, 워싱턴 DC 중앙우체국. 앨 고어 미국 부통령이 '사상 최대 경매'의 개막을 알렸다. 무엇을 팔았을까. 경매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경매에 부친 것은 주파수였으니까. 옛 사람의 시각에서 본다면 '공기'를 사고 판 셈이다. 경매물건은 2㎓ 광대역의 셀 방식(PCS) 통신 서비스. 이듬해 5월까지 계속된 경매에서 99개 사업자에 통신 서비스 사업권과 주파수를 내준 미국 정부는 100억달러가 넘는 자금을 얻었다. 고어를 전면에 내세워 미국이 조달한 '사상 최대'의 경매자금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다. 최근까지 69차례에 걸친 주파수 및 인허가 서비스 경매를 통해 미국 정부는 400억달러를 시장에서 끌어왔다. 봉이 김선달식 발상으로 부족한 연방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이론적 배경은 게임 이론과 내시균형. 당초 미국은 정부가 협찬금을 받고 업체를 지정하는 심사할당제를 고려했으나 내시균형에 입각해 수입액을 예상한 결과를 믿고 자신 있게 경매를 택했다. 타인의 입찰가를 예상해 자신의 입찰가를 써내는 내시균형은 주파수뿐 아니라 벌목권이나 석유시출권 등으로 경매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정부가 불하해 경매에 나오는 주파수를 따내려는 기업들의 경쟁은 '주파수 전쟁'을 낳았다. 미국 정보통신 기업 간 인수합병(M&A) 경쟁도 주파수 경매 이후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미국은 주파수의 70%를 정부가 보유해 앞으로도 조달규모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사정은 미국과 딴판이다. 올해 시범적으로나마 경매제 도입을 추진했으나 전파업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는 상태다. 경매를 실현할 법적 근거조차 없다는 얘기다. 한국에서 주파수 경매는 일러야 2013년께나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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