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우의 로마군단이 사령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193년 4월11일, 48번째 생일에 황제로 추대된 세베루스는 로마로 쳐들어갔다. 당시 로마는 혼란의 시대.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도 포악한 황제로 묘사됐던 코모두스가 살해된 뒤 황제직이 경매로 정해지던 시기였다. 로마로 진격해 제위를 차지한 세베루스는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황제였다. 혈통은 로마인이었지만 지금의 트리폴리에서 태어나 전장을 누볐던 그는 황제가 되자마자 군대부터 챙겼다. 친위대를 네 배로 확장하면서 도나우군단 출신을 요직에 심고 급여도 두 배로 올렸다. 기반이 약했던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세베루스는 통치의 근원도 전쟁에서 찾았다. 완충지역으로 삼았던 변방지역을 공략한 그는 전투마다 승리해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골칫거리였던 파르티아와의 두 차례 전쟁에서 이긴 후 세운 개선문은 요즘도 로마의 관광 명물로 남아 있다. 황제의 권위를 높인다며 목욕탕과 궁전 등 대건축물도 잇따라 세웠다. 문제는 돈이 무한정 들어갔다는 점. 결국 그는 통제경제를 실시하고 세금을 올렸다. 불만이 높아지자 속죄양으로 내세운 게 기독교도. 태양신을 섬기는 제사장 딸 출신인 황후의 조언대로 로마의 전통신앙을 부활시키고 강력한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다. 로마의 특장점이던 ‘관용’도 이때부터 사라졌다. 세베루스의 사망(211년) 이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대규모 건축과 세금 인상, 악화(惡貨) 주조가 반복되고 정치적으로는 군인황제시대로 접어들었다. ‘안정’을 내세우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세베루스가 뿌린 씨앗이 더 큰 혼란을 낳은 셈이다. 명저 ‘로마제국 흥망사’를 지은 에드워드 기번은 세베루스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다. ‘로마제국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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