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얘기지만 지난해 봄 모 소상공인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한 적이 있다. 소상공인의 애로가 뭐고 정부와 대기업이 뭘 해야 하는지 백가쟁명(百家爭鳴) 정도는 아니어도 꽤 많은 얘기가 나왔다. 그 중 아직도 뇌리에 남는 게 "출자총액제한제로 골목상권을 지키자"와 "간이사업자 면세기준을 연간 매출 4,800만원이 아니라 1억원 이상으로 올려야 소상공인이 산다"는 제언들이다.
대기업집단의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부활시켜 문어발 확장을 막자는 얘긴 골목상권 침해와 직접 연관이 적어 보여 고개를 갸우뚱한 기억이 난다. 또 지긋한 나이의 한 자영업자가 면세혜택을 늘려 달라는 모습에선 담세율이 50%도 안 되는 한국의 불공정한 현실이 떠올라 맘이 편치 않았다.
첫 여성 대통령이 될 박근혜 당선인이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제치고 중소기업중앙회를 먼저 방문, '중소기업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손톱 밑 가시'도 뽑겠단다. 이를 신호탄으로 중소업계는 물론 정부ㆍ산하기관ㆍ경제단체ㆍ언론이 모두 중소기업 지원을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다.
중소기업 육성은 사실 '착하게 살자'류의 당위적 명제다. 중소기업은 산업의 뿌리이자 허리다. 글로벌 강소기업을 많이 만들어야 한국 경제가 튼튼해진다는 소린 수십년 전부터 나왔다. 그러니 너도나도 "어려운 이웃을 돕자"며 중소기업 지원을 열심히 외치는 건 2013년 한국판 '애국의 길'이다. 하물며 새 정부 수반이 중소기업 강국을 외치고 있음에랴… .
중기 육성 하자면서 현실성 안보여
문제는 아무리 당연하고 좋은 얘기도 구체성ㆍ현실성이 떨어지면 하나마나 하다는 점이다. 성폭력이 난무하니까 도덕성 교육을 강화하자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성범죄 전과자들의 재범을 막는 데 그리 효과 있는 대책이 될 수 없다. 이에 더해 불순한 의도가 개입하면 배는 산으로 간다. 겉으로는 훌륭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뒤로는 차제에 정부 돈을 더 타내고 정부개편에 맞춰 조직 위상을 강화하려는 노림수가 곳곳에서 보인다.
지난 16일 대한상공회의소는 한국의 중소기업수가 미국ㆍ일본에 비해 너무 많은데 이는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한 병목현상 탓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언뜻 맞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한국은 자영업자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두 배(28.8%)로 그 수가 워낙 많다.
이 같은 자영업 과잉현상 때문에 한국의 중소기업 비중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나오는데도 대한상의는 중견기업 지원부족으로 중소기업이 못 커 중소기업 수가 많다고 주장했다. 이참에 중견기업도 중소기업전용 조달시장에 끼워주고 정책자금ㆍ세제혜택도 듬뿍듬뿍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KOTRA는 새해 벽두부터 내용은 엉터리지만 제목만 그럴싸한 보고서로 큰 재미를 봤다. 독일ㆍ스웨덴과 비교해 한국의 중견기업 수가 적어도 너무 적다며 우국충정을 토로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 그런데 KOTRA는 중견기업 기준을 한국은 매출 1,500억원 이상으로 독일과 스웨덴은 매출 700억원 이하로 잡았다. 당연히 한국의 중견기업 비율이 턱없이 낮을 수밖에 없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이 보고서가 그대로 한국 언론에 대서특필됐다는 점이다.
심도있는 논의로 인프라 구축 나서야
지난 대선기간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는 서양 속담이 유행했다. 사소한 곳에 일을 그르치는 큰 실수가 숨어 있다는 뜻이다. 최근 중견ㆍ중소기업 지원 목소리를 듣다 보면 실수가 너무 많아 보인다. 아니 실수라고 보기엔 특정 이해관계에 매몰된 의도적 왜곡이 적지 않다.
수준 높은 전문가들의 심도 있는 논의가 아쉽다. 장사꾼들의 약 파는 소리만 떠들썩하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중소기업이 대세'라며 이 기회에 한몫 챙기려는 간사한 눈초리 대신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위해 흙먼지를 뚫고 기초공사(인프라 구축)에 나서는 우직한 일꾼들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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