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서울 명동에 자리한 신용회복위원회 본사. 채무조정(워크아웃) 상담을 받고 있는 정모(54)씨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처지가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는 한때 잘나가는 건축설계사였다. 하지만 건설경기 침체로 회사가 문을 닫자 하루아침에 실직자로 전락했다. 2년 가까이 수입 없이 대학에 재학 중인 두 자녀의 뒷바라지를 하다 보니 금세 빚이 쌓였다. 정씨는 "가족들을 돌보며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노후준비는 생각도 못했다"고 씁쓸해하면서 "하루빨리 빚을 갚아 제2의 인생을 설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내년이면 설립 10년째를 맞는 신용회복위원회는 이제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구원병'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초대 이연수 위원장 시절만 하더라도 이름조차 낯설었지만 지금은 빚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번쯤 상담이나 직접 방문할 정도로 우리 사회의 금융거래에 든든한 첨병이 됐다. 신용회복위원회가 출범 10년을 맞아 새로운 신용회복지원제도를 위한 밑그림을 다시 짜고 있다. ◇법원 파산신청 전 사전상담 의무화=제도 변화의 중심은 '사전상담제도'다. 이 제도는 개인들이 법원에 개인파산이나 회생절차를 신청하기 전 반드시 신복위를 거쳐 상담을 받도록 하는 것으로 개인파산을 악용하는 모럴헤저드를 방지하고 더 많은 과중채무자들의 재기를 돕겠다는 취지로 마련됐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실행 중인 제도로 4월 수장을 맡은 이종휘 위원장의 야심작이다. 이 위원장은 "워크아웃으로 충분히 채무조정이 가능한 사람도 사실상 경제적재기가 불가능한 법원의 개인파산 및 회생제도로 몰리고 있다"고 제도 도입 배경을 설명했다. 여기에는 법원의 개인파산 및 회생제도를 채무회피 수단으로 악용하는 모럴해저드를 차단, 사회적 비용을 줄이자는 계산도 함께 깔려 있다. 법원은 개인파산 제도의 악용을 막기 위해 올해부터 도박이나 과소비로 인한 채무는 면책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파산 신청은 전년도 대비 줄어든 반면 회생 신청은 도리어 늘어나는 풍선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10월 말 현재 신복위 신용회복절차 신청자는 7만5,794명인 데 반해 법원의 개인파산 및 회생신청자는 10만8,500명에 이르고 있다. 신복위는 정치권과 법무부에 사전심사제도 도입 필요성을 제안하고 있지만 의견조율이 필요한 상태다. 따라서 신복위는 내년에 창립 10주년 세미나를 개최해 신용회복지원제도의 개선방향에 대한 청사진을 도출, 사전심사제도에 대한 여론몰이에 나서기로 했다. ◇10년간 채무불이행자 20만명 구제=신복위는 199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외환위기와 카드사태로 채무불이행자가 속출하던 상황에서 2002년 설립됐다. 1998년 외환위기 속에 출범한 DJ정부는 신용카드 발급을 확대해 침체된 내수경기를 부양하려고 했다. 당시 길거리마다 카드 회원을 유치하는 부스가 난립하고 갖가지 경품이 동원됐다. 결국 곪을 대로 곪다 2003년 카드 사태가 터졌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신복위 워크아웃 신청 건수는 54만3,600건에 이른다. 이는 신복위 출범 이후부터 올해 9월까지 총 누계 신청 건수인 100만1,600여건의 절반이 넘는 규모다. 이에 따라 카드 사태로 워크아웃 절차를 밟은 50만여명 중 올해 9월 기준 18만3,535명이 졸업했다. 나머지 30만명은 중간에 상환 계획을 이행하지 못해 탈락했지만 이도 의미 있는 수치로 평가되고 있다. 신복위 관계자는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채무불이행자들이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줬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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