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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사슴'은 '사슴'이라 부릅시다

김영학 무역보험공사 사장


중국 진나라의 환관 조고는 진시황의 신뢰를 바탕으로 엄청난 권세를 누렸다. 진시황의 아들 대에 이르러서는 황제도 두려워할 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자랑했다. 그 권력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황제의 눈앞에서 멀쩡한 사슴을 말이라고 우겨도 누구 하나 감히 나서지 못할 정도였다. 이는 사기(史記)에 나오는 '지록위마(指鹿爲馬)' 고사의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기업 경영에서도 '사실'보다는 '권위'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정확한 상황을 판단하기 어려워지고 멀쩡한 사슴이 말이 돼버리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한 기업의 의사결정이나 위험관리에 있어서도 이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면 소통이 막히고 냉철하게 위험을 감지하기 힘들어진다. 수익을 창출하는 영업이나 투자 관련 부서는 기업에서 대체로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위험을 걸러내야 하는 재무나 리스크 관리 부서는 어렵게 따 온 프로젝트나 대출을 현장도 모르고 기각하는 '소심쟁이'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시작도 비슷했다. 모기지채권의 유동화가 급증하고 위험이 크게 늘었지만 당시 투자은행의 캐시카우(cashcow) 역할을 하던 모기지 채권을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간 큰 투자은행가는 흔치 않았다. 굳이 먼 기억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지난 수년간 해외 건설 공사를 수주했던 국내 건설사들이 대규모 손실을 볼 처지에 놓여 있다. '저가수주'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수주가뭄 탓에 '위험관리'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다.

리스크 관리의 본질은 복잡한 시스템이나 수학적 모델이 아니다. '위험한 것을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열린 분위기와 문화를 만드는 것이 가장 훌륭한 위험관리다. 사슴을 사슴이라 말하지 못하고 눈앞의 이해관계에 떠밀려 말이라고 말해 버리는 순간 재앙이 시작된다. 사슴을 사슴이라고 외치는 사람에게는 불이익을 주면서 거액의 돈을 들여 시스템을 구축하고 전문가를 영입한다 한들 소용이 있을 리 없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어빙 제니스에 따르면 조직 구성원들이 외부로부터 고립된 상태에서 충분한 토의가 이뤄지지 못하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공동체가 항상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강요되는 '집단사고'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그리고 사회적 배경과 관념의 동질성이 높거나 지시적인 리더십하에서도 집단사고가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

다양한 분야의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사외이사 제도나 심의위원회 활성화가 기업 경영의 투명성 제고뿐만 아니라 집단사고를 예방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비슷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에서 새로운 시각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지금은 열린 분위기와 다양성이 경쟁력인 시대다.

상식적으로 참 쉬워 보이지만 위험한 것을 위험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남과 다른 시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열린 분위기와 다양성이 재난을 예방하는 최고의 '안전 벨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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