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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에 본사를 둔 금융회사 ING 그룹의 요안나 코타르씨는 네덜란드인들이 지난 1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EU)헌법에 반대표를 던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네덜란드는 유럽내 금융강국으로 자리잡았는데 통합 이후 25개국의 일원이 되면 이런 지위가 위축될 수 있어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EU헌법 비준 국민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장기적으로는 모르지만 최근 유럽 통합의 속도가 너무 빨라 혼란스럽습니다.” 풍차와 치즈로 유명한 네덜란드는 최근에 거스 히딩크 전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과 며칠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행을 결정한 박지성 선수로 더욱 친숙해진 나라다. 이달초 국민투표에서 반대 61.6%, 찬성 38.4%의 압도적인 표차로 EU헌법 비준안이 부결된후 현지에서 만난 네덜란드인들은 여전히 EU 통합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수도 암스테르담 중앙의 담 광장에서 만난 회사원 마샤 스탈씨는 강한 어조로 유럽통합에 불만을 나타냈다. 그녀는 “유로화 도입 이후 너무 많은 것들이 변했다”며 “유럽통합이 이런 변화를 가속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불안하다”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또 “EU헌법 자체가 연금혜택 등 사회복지 체계 전반의 하향 평준화를 가져올 수 있어 상대적으로 부유한 국가들이 반대하고 있는 것”이라며 “프랑스, 영국 등이 반대하게 이유가 어디 있겠냐”고 강조했다. 인터뷰 내내 ‘어게인스트(against)’를 수차례 반복한 그녀는 미쳐 다 얘기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지 이메일 주소까지 적어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네덜란드의 정체성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도 나왔다.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가 열렸던 소도시 엠엔에서 목축업을 하는 얀센 도르프씨는 “네덜란드말도 잊혀질까 걱정스러운데 유럽을 하나로 묶는 헌법에 찬성할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국민투표에 앞서 EU헌법 반대자들을 결집시킨 구호가 “우리는 네덜란드인으로 남고 싶다”였다는 말이 새삼 상기됐다. EU는 지난 99년 유럽을 정치ㆍ경제적인 단일체제로 묶어 미국에 대항해 세계의 중심지역으로 거듭나기 위해 헌법 논의를 시작했다. 하지만 헌법 제정을 주도적으로 해 왔던 프랑스가 지난 5월 부결한데 이어 네덜란드도 부결시켰고 영국과 덴마크 등이 국민투표 일정을 연기하기로 결정하면서 사실상 헌법이 사문화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달 중순 열렸던 유럽정상회담에서 헌법을 일시중단(사실상 무기한 중단)하기로 결정한 상태다. 헌법 논의 중단은 EU에 대한 경제적 해체로 비화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경우 단일 통화인 유로를 버리고 리라화를 재도입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 대두하고 독일과 프랑스 등 경제 대국들은 재정적자폭 확대와 금리 인하를 주장하고 있다. 네덜란드인들이 EU헌법에 반대하는 이유에는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반감도 있었다. 이준 열사의 기념비가 있는 덴하그에서 만난 론 드로스트씨는 “정부는 EU헌법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대한 홍보를 국민투표 두달을 남겨 놓고서야 시작했다”며 “난 아직도 EU통합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지, 정치인들이 이것을 왜 추진하는 지 정확히 모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EU헌법 비준에 찬성한 네덜란드인들은 어떤 입장일까. 정부기관 관계자인 프랭크 위스씨는 “네덜란드가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는 유럽 국가간의 네트워크가 보다 견고해져야 한다”며 “당장은 어렵더라도 다시 추진해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전했다. 하지만 5일 동안 만난 네덜란드인들 대부분은 ‘유럽통합 없이도 우리는 잘 살 수 있다’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들은 유럽 각국의 정상들이 주장하는 ‘강한 유럽’보다는 ‘강한 네덜란드’를 더욱 절실히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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