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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Watch] 대체 배우 '커버'의 세계

언제 무대 오를지 모르지만… '내일의 뮤지컬 스타' 꿈꾸며…

매일 공연장 출근하는 '또 다른 주연'

1.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 프리마돈나인 칼롯타(왼쪽)는 무대의 안전을 이유로 공연 전 극장을 떠난다. 그녀의 코러스였던 무명의 크리스틴(오른쪽)이 대신 무대에 오르며 새로운 프리마돈나의 탄생을 알린다. /사진제공=설앤컴퍼니

2. 1973년 뮤지컬 ''그리스''에서 주인공 대니 역의 언더스터디로 데뷔한 영화배우 리차드 기어(오른쪽) /사진제공=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V&A)

3. 뮤지컬 ''킹키부츠''에서 드랙퀸(여장남자) 배역 6명의 스윙을 담당하고 있는 배우 강동주(왼쪽 두번째) /사진제공=CJ E&M


관객의 갈채·화려한 조명 없지만 구멍난 배역 대신위해 '항시 대기'
얼터·언더·스윙 등 이름도 다양… 주연 배우 버금가는 연습량 소화
멀티·스타캐스팅에 기회 줄지만 '준비된 커버' 주인공 꿰차기도


#뮤지컬 개막 전 최종 리허설, 여주인공 도로시의 부상으로 어렵게 투자받은 작품은 공연 취소 위기에 처한다. 절체절명의 상황에 연출가 줄리안은 시골 출신 배우 지망생이자 작품의 코러스 걸이었던 무명의 페기 소여에게 주인공 역할을 제안한다. 동료들의 도움과 도로시의 격려로 성공적인 무대를 펼친 페기.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는 무명 배우가 뮤지컬 프리마돈나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렸다.

뮤지컬 속 '신데렐라 스토리'는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대사와 노래·춤 모든 준비는 끝났지만 언제 무대에 설지는 모른다. 그래도 매일 뮤지컬 공연장에 출근하며 '항시 대기 중'인 사람들이 있다. 관객의 갈채와 화려한 조명은 다른 곳을 향해 가지만 공연에 없어서는 안 될 '커버 배우'가 그 주인공이다. 주요 배우가 무대에 설 수 없는 위기의 상황에서 언제든 대신 공연을 펼칠 수 있는 만능 열쇠요, 보험 같은 대체 배우. 언더스터디·스윙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이들은 묵묵히 구슬땀을 흘리며 '내일의 주인공'을 꿈꾸고 있다.

페기 소여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도 오페라 공연을 앞두고 겁에 질려 극장을 떠난 주연 배우를 대신해 무명의 크리스틴이 무대에 올라 공연을 펼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작품 밖 현실에서도 할리우드의 신사 배우 리차드 기어가 뮤지컬 '그리스'의 주인공 커버 배우로 데뷔했다는 성공 스토리가 있다.

◇얼터?언더?스윙? 이름도 다양=커버는 구멍 난 배역을 대신한다는 의미에서 붙은 용어다. 주요 배우의 출연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들을 대신해 무대에 오르는 대체 배우를 통칭한다.

커버 배우는 크게 얼터너티브(이하 얼터)와 언더스터디(이하 언더), 스윙으로 나뉜다. 얼터는 주 1회, 혹은 총 OO회 등 공연 횟수를 보장받고 무대에 오르는 배우를 뜻한다. 1개 배역을 1명의 배우가 소화하는 '원캐스팅'이 일반적인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는 주 8회에 달하는 공연을 한 명의 배우가 장기간 소화할 수 없어 하루 2회 공연이 있는 날에는 얼터 배우가 무대에 서곤 한다. 9일 개막한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경우 바다와 소녀시대 서현이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은 가운데 얼터로 신예 함연지가 캐스팅돼 이달 말 첫 공연을 앞두고 있다.

언더는 얼터와 달리 언제 무대에 오른다는 기약이 없는 '차차선'의 배우로 이들이 주인공 대신 무대에 오르는 일은 많지 않다. 언더는 신인배우들이 주로 맡아 기본기를 쌓는 기회로 삼지만 해외 유명 대작은 해당 작품 경험이 많은 관록의 배우들이 언더를 소화하곤 한다.

스윙은 '비상 열쇠'이자 '만능 열쇠'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다. 스윙은 코러스·군무를 담당하는 앙상블 배우를 대체한다. 개별 앙상블마다 대사와 노래·춤은 물론 개인기와 동선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스윙은 이들의 특징을 모두 외우고 미리 연습해야 한다. 뮤지컬 '킹키부츠'에서 배우 강동주씨는 '엔젤(여장남자 앙상블)' 6명의 배역을 모두 소화하는 스윙으로 최근 엔젤 배역 중 한 명인 한선천씨가 발목 부상을 당하면서 3~4일 대신 무대에 올랐다. 여러 배역을 미리 숙지해야 하기 때문에 스윙은 무대 경험이 많은 배우가 주로 맡는다. 강씨는 현장 안무 팀장 격인 댄스 캡틴을 맡고 있고 뮤지컬 '원스'의 스윙 오정훈씨 역시 댄스·뮤직 캡틴을 담당하고 있다.



◇주인공 버금가는 연습량=연습량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스윙은 오히려 여러 배역을 모두 숙지해야 해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하고 언더 역시 대부분 작품에서 앙상블이나 단역을 맡고 있어 최소 2개 이상의 역할을 소화한다. 주요 배우들과 합을 맞춰 볼 기회가 적은 만큼 수시로 배우들의 동선을 메모하거나 녹화하며 배역을 연구한다. 뮤지컬 '원스'에서 남자 조연 4명을 커버하는 오씨는 배우들의 합주에 사용되는 15종의 악기 중 무려 10종을 다룬다. 오케스트라 없이 무대 위 배우 12명이 라이브 합주를 펼치는 작품의 특성상 오씨는 각 악기의 파트부터 주요 동선까지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연습의 정도를 수량화할 수는 없지만 몇 배의 집중력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역할인 셈이다. 오씨는 "스윙은 어느 상황에서든 투입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무대와 작품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며 "다른 배우들보다 연습량이 월등히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개인 연습이 없을 때는 배우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연기하는지 뒤에서 체크하며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멀티·스타캐스팅에 커버배우 기회 줄어=대체 배우 시스템은 장기 원캐스트 공연이 대부분인 미국과 영국에서 일반화돼 있다. 국내 뮤지컬도 얼터는 아니더라도 언더나 스윙 등 커버 배우를 늘 대기시키고는 있다. 다만 대형작을 중심으로 1개 배역을 여러 배우가 나눠 하는 멀티캐스팅이 늘어나면서 커버 배우의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원캐스트 작품이라도 배우들의 자기 관리가 철저해 언더가 대체 투입되는 일은 많지 않다. 예컨대 지난해 주연 배우 원캐스트로 화제를 모은 뮤지컬 '시카고'에서는 여자 교도소 죄수 '리즈' 역을 했던 배우 연보라가 주인공 벨마(최정원)의 커버를, 후냑 역의 최은주가 또 다른 주인공 록시(아이비)의 커버를 담당했지만 이들이 주인공으로 무대에 선 적은 없었다.

◇준비된 보석은 기회를 잡는다=그렇다고 커버 배우를 '서럽고 눈물겨운 존재'로만 바라본다면 큰 실수다. 커버라는 포지션 자체가 연출진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강씨는 킹키부츠 엔젤 배역으로 오디션을 봤지만 6명의 엔젤에게 필요한 개인기를 모두 소화할 수 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아 스윙 겸 댄스 캡틴에 낙점됐다. 강씨는 "스윙은 1개 배역에 몰입하는 것이 아닌 여러 배역과 극 전체의 조화를 봐야 하기에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며 "매일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는 아쉬움보다는 여러 역할을 공부할 수 있다는 매력이 더 크다"고 밝혔다.

뮤지컬 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커버·언더·스윙 등 대체 배우들은 주요 배우와 비교해 누가 위고 누가 아래라고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평소 작품과 캐릭터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며 "충분한 준비와 경험을 좋은 기회로 만든 사례도 많다"고 설명했다. 관객의 환호도, 무대의 조명도 다른 곳을 향하고 있지만 '내일의 배우'를 꿈꾸는 이들이 묵묵히 대체배우 역할을 소화하는 이유다.

실제로 배우 주원씨가 뮤지컬 '스프링어웨이크닝'의 언더스터디로 시작했지만 주인공의 부상 이후 주연으로 발탁, 150회의 공연을 이끌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2006년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서 크리스, 투이 역의 언더스터디를 맡았던 홍광호씨는 지난해 '미스 사이공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투이 역에 당당히 캐스팅돼 한국인 최초로 영국 웨스트엔드에 진출했다.

공연 리뷰나 보도자료에는 좀처럼 소개되지 않는 작품 정보를 담은 프로그램북에도 캐스트 말미에 커버 혹은 언더·스윙이라는 이름으로 짤막하게 등장하는 사람들. 이들의 사진과 이름을 꼼꼼히 읽어두시라. 그들이 바로 대체 불가능한 '내일의 뮤지컬 스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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