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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11월13일] 엔리케


‘바닷물이 끈적거리고 뜨거운 햇볕에 배가 불타버린다.’ 옛 사람들이 생각한 적도 부근 바다의 모습이다. 바다에 대한 공포를 먼저 뛰어넘은 나라는 포르투갈. 십자군전쟁 과정에서 생긴 작은 나라 포르투갈은 어떻게 남보다 앞서 바다에 주목하고 대양을 지배하는 강자로 떠올랐을까. 엔리케(Henrique) 덕분이다. 영국과 프랑스간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394년 포르투갈 아비스 왕조를 창시한 주안 1세의 3남으로 태어난 엔리케의 이름이 알려진 계기는 21세 때인 1415년 8월의 세우타 점령. 이베리아 반도(스페인 일대)의 상당 부분을 아랍인이 점유하고 있던 시절, 포르투갈이 바다를 건너 북아프리카 서북부 무어족의 근거지인 세우타를 빼앗은 사건은 유럽이나 아랍에나 충격이었다. 세우타 총독에 임명된 엔리케의 선택은 동맹과 무역. 아프리카 또는 아시아에 있다는 전설 속의 기독교 왕국을 찾아내 이슬람을 협공하는 한편 후추 같은 향신료와 보물을 얻겠다는 생각에서다. 끝없이 탐험대를 내보낸 엔리케는 1460년 11월13일, 66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기독교 왕국도, 후추도 찾지 못했지만 적도 근처의 바다를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포로로 잡은 아프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팔아 돈을 챙긴 것도 엔리케가 처음이다. 포르투갈이 희망봉과 인도항로를 개척하고 15세기 지리상의 발견을 주도한 것도 엔리케가 깔았던 해양인프라 덕택이다. 엔리케는 죽을 때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학자와 선원, 조선기술자를 모아 해양연구소와 선원학교, 조선소를 세우는 등 바다개척에 혼신을 힘을 쏟았다. 단 한번도 왕위에 오른 적이 없지만 ‘항해왕’이라는 이름으로 길이 기억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서구문명이 세계사를 주도하게 된 것도 엔리케 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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