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4년 사이 예술교육은 조용하지만 큰 변화를 겪고 있다. 학교에는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예술교육 대신 체험과 표현을 강조하는 활동이 급속히 늘고 전임교사 외에도 예술강사가 더러 눈에 띈다. '엘 시스테마' '남격 합창단'열풍과 함께 학교오케스트라나 합창동호회ㆍ악기동호회가 곳곳에서 새롭게 창단되고 예술계 대학이나 예술가들이 지역 사회와 만나 공동체 예술교육을 펼친다는 기사도 제법 잦아졌다. 음악이나 미술교과 외에 연극이나 무용ㆍ영상 등 새로운 수업을 시도하는 초ㆍ중등학교와 방학예술캠프, 직원교육에 예술강좌를 편성하는 기업과 공공기관도 상당수 증가하고 있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가치에 관심
창의인재ㆍ창조경영ㆍ창조경제라는 시대의 구호와 만나 우리 사회에서 예술교육의 필요성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관심을 받는다. 드라마와 K팝의 해외 성공담은 우리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흔들며 문화의 경제적 힘을 뚜렷이 각인시켰고 일각에서는 한류를 지속할 영재교육을 제도적으로 펼쳐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국내 뮤지컬 산업의 성장과 싸이의 국제적 흥행신화는 문화적 지원이 곧 경제적 투자라는 믿음을 크게 확산시키면서 글로벌 경쟁력을 지닌 작품생산을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이끈다.
예술은 이제 배워야 하는 지식이며 아는 사람들만의 현학적 교양이라는 선입견을 벗어던지고 평범한 일상의 삶을 위로하고 자존감을 맛보는 도구이자 창의적 사고와 도전을 체득하게 하는 교육적 도구, 그리고 국가의 경제적 자원으로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서구예술이 우리 사회에 유입되고 100년이 지나면서 비로소 예술의 정보가 아닌 가치를 주목하는 사회적 시각을 갖추게 된 듯해 반갑기도 하다.
그런데 그 예술의 가치를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자. 한류 현상지속을 위한 우리 사회의 논의가 문화와 문화상품의 가치를 혼동한다는 지적은 이미 더러 있었다. '한국문화의 우수성 입증'이니 '서구문화의 본고장(파리) 점령'과 같은 표현에서 우리는 제국주의적 관점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면서 타 문화와의 대화나 화해의 힘에 대해 그리 주목하지 않았다. 악기를 익히고 뮤지컬을 공연하는 학교의 체험활동은 여전히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고 낭만주의 작곡가의 이름과 작품명을 외우는 교실의 수업이 그러하듯 미숙한 생각을 듣고 표현하는 즐거움을 돕기보다 암기와 따라 하기를 주문하기 일쑤다.
타인을 지배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 유식해 보이기 위해 우리가 예술을 곁에 두는 것은 아니다. 느낌과 생각을 언어 아닌 도구로 표현하고 다른 이의 그것을 이해하고 소통하면서 얻는 즐거움이 지친 삶에 활력소가 되기에 우리는 아이들에게 예술의 문법을 안내한다. 무심코 지나치던 전시회 포스터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예술가의 생각에 품어보는 호기심, 몰입의 즐거움 속에서 얻는 성취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예술교육은 존재해야 한다.
예술가보다 예술애호가 교육해야
새 정부는 예술과 문화를 정책의 중요한 화두로 삼고 문화복지국가를 향한 제도정착을 다짐하고 있다. 문화 복지는 예술적 지식과 돈 나누기가 아니라 예술의 가치를 나누고 그래서 개인이 행복한 사회의 길을 닦는 사명으로 구현돼야 할 것이다. 세상의 예술은 저마다 전통적 문법을 가지고 있다.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문법을 공유하는 일이 선행돼야 하는 것이 자명하다. 문화복지정책에 예술교육정책이 함께 가야 하는 이유다. 단 삶의 이해를 전제로 하는 예술교육이 펼쳐져야 할 것이다. 예술이 인문학을 만나야 하는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예술가 교육과는 구별되는 예술애호가 교육이 전국민을 대상으로 정교히 설계될 수 있기를 새 봄의 아침에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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