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국 민주화 운동 큰별 지다
입력2011-12-30 16:38:28
수정
2011.12.30 16:38:28
김근태 민주통합 상임고문 타계<br>열차례 고문 후유증으로<br>60년대 서울대 재학시절<br>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투신<br>15대 총선 이후 내리 3선
한국 민주화운동의 큰 별이 졌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30일 오전 향년 6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김 고문은 이날 오전5시31분 뇌정맥혈전증과 2차 합병증이 겹치며 패혈증으로 숨을 거뒀다. 김 고문은 지난 2007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아 약물치료를 받아왔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받은 열 차례 고문의 후유증이 영향을 미쳤다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1947년 2월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난 김 고문은 1960년대 서울대 재학 시절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몸을 던졌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당시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손 전 대표는 김 고문이 숨을 거두기 전 트위터에 "근태야. 꼭 가야 되겠니. 다시 좀 일어설 수 없겠니"라는 글을 남기며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김 고문은 1967년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 당시 총선과 대선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제적당했고 군대에 강제 징집됐다. 1970년 복학한 김 고문은 이듬해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지명수배를 받았으며 1983년에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1985년에 투옥된 김 고문은 '고문 기술자'인 이근안에게 여덟 차례의 전기고문과 두 차례의 물고문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평생 동안 고문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스스로 죽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악몽같았던 고문경험을 담은 책 '남영동'을 냈으며 2004년에는 복역 중이던 이근안을 직접 면회해 "용서한다. 건강하시기를 빈다"는 말로 역사적 용서를 했다.
1994년 김 고문은 제도권 정치로 눈을 돌렸다. 당시 민주자유당에 반대하는 세력을 결집하는 민주연합정당을 만들기 위해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1995년에는 당시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를 맡으며 본격적인 정당활동을 시작했다. 또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 출마해 당선된 후 17대까지 내리 3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2008년 18대 총선에서 정치 신인인 신지호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게 1.8%포인트 차로 아깝게 낙선했다.
민주통합당은 이날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시대 민주화의 진정한 운동가 김근태 고문이 부디 국가 폭력과 고문이 없는 하늘에서 평안하기를 기도한다"며 조의를 표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 등 당권 후보를 비롯해 소속 의원들도 일제히 빈소를 찾아 합동 조문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김 고문의 죽음에 대해) 깊은 조의를 표하고 명복을 빌겠다"고 말했다.
오늘의 핫토픽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