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재정위기의 최후의 방화벽인 유로안정화기구(ESM)이 출범 전부터 흔들리고 있다.
유럽 정상들은 당초 5,000억유로(702조원) 규모의 ESM을 9일(현지시간) 출범시켜 위기국 국채를 매입하거나 부실은행에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사태수습에 나설 계획이었다. 하지만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내에서 국가별 비준과정이 늦어지고 있는데다 자금 사용처에 대한 의견도 엇갈리면서 위기해결이 지연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가장 큰 문제는 ESM이 정상적으로 개업 테이프를 끊을 수 있을지 여부다. 유로존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 의회는 지난달 29일 ESM 출범을 승인해 한숨을 돌리는 듯했으나 군소 야당들이 비준 직후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을 내면서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이와 관련, 독일 헌재는 10일 첫 공판을 열 예정이다. 앞으로 추가 공판이나 검토작업이 필요해 7월 출범이 물 건너갈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정치권의 합의가 이뤄진 안건인 만큼 위헌 판결이 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전망이지만 자칫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올 경우 유럽 위기의 해법이 근본적으로 꼬일 수 있다.
이탈리아 의회 또한 ESM 승인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마리오 몬티 이탈리아 총리는 "늦어도 이달 말까지는 ESM을 비준해야 한다"고 의회를 압박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표결일정이 잡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칫 오는 8월 초 의회 휴회 전까지 비준이 어려울 수도 있다.
이 밖에 키프로스와 에스토니아 의회도 여전히 ESM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이들 국가의 ESM 출자비율은 각각 0.19%, 0.18%에 불과해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관련법상 ESM은 만장일치가 아니더라도 이를 승인한 나라의 출자비율이 전체 90%를 넘기면 바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ESM 출자비율은 독일이 27.14%(1,900억유로)로 가장 높고 프랑스(20.38%)와 이탈리아(17.91%), 스페인(11.90%), 네덜란드(5.71%)가 뒤를 잇는다.
일단 ESM이 출범에 성공하면 유럽 위기해법의 큰 뼈대가 세워지는 셈이지만 여전히 앞날은 불투명하다. 천문학적인 자금을 어떻게 사용하고 또 감시할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연합(EU) 정상들은 지난달 ESM 자금을 스페인과 아일랜드 등 부실은행에 직접 지원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전제조건을 달았다. 구제기금을 가져다 쓰는 은행들을 직접 감시할 수 있는 일종의 유럽판 금융감독원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각종 절차를 감안하면 이 금감원이 세워지는 시기는 일러야 내년 초가 될 가능성이 크고 그동안 스페인 은행들은 자금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중앙은행(ECB) 산하에 역내 25개 대형은행을 직접 감독하는 기관을 세우는 방안이 9일 유로존 재무장관회의에서 논의됐지만 뚜렷한 결론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고 보도했다.
ESM이 위기국의 국채를 직접 사들여 채권시장을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활동영역을 넓힐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다. 네덜란드와 핀란드는 지난 2일 공식적으로 이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양국의 출자비율을 모두 합쳐도 7.51%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국 열쇠는 독일이 쥘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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