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11월29일, 제96회 정기국회 본회의가 18개 세법안을 통과시켰다. 만장일치로 통과된 다른 법안들과 달리 유독 하나, 부가가치세법안은 표결을 거쳤다. 재석 176명 중 찬성 128, 반대 47. 정부가 구상했던 부가세의 원래 명칭은 거래세. 국회 토의 과정에서 한국동란 당시 서울에 진주한 김일성이 ‘거래세’를 거뒀다는 주장이 나와 황급히 부가가치세로 정해졌다. 이듬해인 1977년 7월부터 부과된 부가세는 ‘3년간의 준비와 예행연습을 반복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재무부의 장담을 비웃듯 각종 부작용을 쏟아냈다. 당장 물가가 올랐다. 상인들이 12%(요즘은 10%)의 세율만큼 가격을 올렸기 때문이다. 더욱 요동친 것은 부동산. 여의도 지역의 아파트 값은 1년 동안 3배 이상 뛰었다. 아파트 파동과 30~40%의 물가 앙등은 1978년 총선에서 집권 공화당이 야당인 신민당에 득표율에서 1.1% 뒤지는 정치적 이변으로 이어졌다. ‘5공 정권의 설계자’로 불리는 허화평 전 의원의 평가를 들어보자. ‘유가 폭등, 중화학공업 과잉투자 후유증이 경제를 압박하는 와중에 도입된 부가세가 상인과 소비자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며 유신체제에 대한 정치적 불만과 맞물려 부마사태가 일어났다.’ 학생들의 시위에 합류한 상인들은 서부산세무서에 불을 질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에서도 유신말기의 경제위기를 강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조세저항은 굳이 멀리 갈 것도 없다. 쏟아지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야당 대선후보가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데도 현 정권의 경제 운용에 대한 불신과 종합부동산세로 상징되는 조세불만이 깔려 있다. 정권까지 흔들리는 부작용, 오랜 세월의 고통 속에서도 부가세는 세수의 30%를 메워주는 재정의 버팀목으로 자리잡았다. 종부세의 앞날은 어떻게 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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