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태로 서방권과 러시아 간 상호 보복전이 가속화하면서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 경제가 디플레이션 위기에 빠진 가운데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는 더 큰 비명을 지르고 있다. 재정 수입, 수출 등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러시아 경제가 더 악화하면 2008년 금융위기 때처럼 경기 침체와 부동산 시장 붕괴, 은행 파산 등의 사태를 재연할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들 중앙아시아 지역은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 경제 개혁이 부진하고 상품 수출에 의존하고 있어 우크라이나 위기의 충격파가 더 크다.
우선 러시아로 일하러 나간 CIS 국가 근로자들의 송금액이 급감한 게 큰 타격이다. 지난해 CIS 지역 근로자들의 본국 송금액은 250억 달러에 달했지만 올 1·4분기에는 40억 달러에 그쳤다. 타지키스탄의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이 40%에 달하는 근로자들 송금액이 올 1·4분기에 전년 동기보다 13% 줄었다. 이 때문에 올 들어 타지키스탄 통화인 소모니 가치도 달러 대비 5% 하락했다.
타지키스탄의 한 주부인 파란지스 이슬로모바(36)는 "모스크바 교외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남편 송금액이 3분의 2로 줄었다"며 "남편 동생도 함께 일하러 가기로 돼 있었는데 최근 남편이 기존 근로자들도 해고되고 있다며 오지 말라고 전화했다"며 울상을 지었다.
대(對) 러시아 수출 감소도 CIS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경우 수출액 가운데 러시아 비중이 20%를 차지한다. GDP의 10%에 달하는 규모다. 더구나 러시아 의존도가 80%에 이르는 해외 송금액마저 감소하면서 정부 재정이 타격을 입고 있다. 또 우즈베키스탄과 키르키스스탄, 카자흐스탄의 대 러시아 수출 비중도 각각 25%, 15%, 10%에 이른다. 코메르츠방크의 타샤 호세 애널리스트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의 올 2·4분기 성장률이 0.8%에 그쳤다"며 "위기가 해소되지 않으면 CIS 지역에 다양한 충격을 줄 것"이라고 전했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올 들어서 8%나 하락하면서 일부 CIS 국가들의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올해 CIS 자유무역지대에 가입한 카자흐스탄의 경우 지난 2월 자국 텡게이 화폐 가치를 달러 대비 19%나 절하시켰지만 러시아 루블화에 비해서는 오히려 9%나 올랐다. 이 때문에 카자흐스탄의 CIS 자유무역지대 수출은 올 상반기에 전년동기대비 25%나 감소했다.
알리칸 스메일로프 카자흐스탄 통계국 대표는 "지난해 GDP 성장률은 6%에 이르렀지만 러시아 경기 둔화로 올 1~7월 성장률은 4%에 그쳤다"고 설명했다. 영국 국제투자연구소인 트러스티드 소스의 크리스토퍼 그랜빌 소장은 "러시아와 서방 간 갈등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 CIS 경제로 전이되고 있다"며 "러시아가 서방 농산물과 식품 금수 조치를 CIS 전역으로 확대하면 더 큰 타격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들 지역에서 2008~2009년와 같은 금융위기 조짐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당시 러시아 성장률은 마이너스 8%를 기록했지만 올해는 제로 성장 또는 -1% 수준에 머물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벨라루스와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러시아의 서방 식료품 금수 조치로 대 러시아 농산물 수출이 늘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가 더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게 문제다. 그랜빌 소장은 "2009년 러시아 경제 침체는 CIS 지역을 강타했다"며 "러시아 경제가 목이 졸려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CIS 전역의 전망은 암울하다"고 말했다.
소득 감소, 이주 근로자 귀환, 뱅크런 위험 등으로 경제가 더 악화하면 고질적인 영토 분쟁과 맞물려 정정 불안이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몰도바 내의 친러시아 자치공화국인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독립을 요구하고 있고 조지아 내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아주는 이미 독립 공화국을 선언한 상태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걸핏하면 무력 충돌을 벌이고 있다.
한편 CIS 국가보다는 사정이 낫지만 러시아의 농산물과 낙농·육류 제품 금수 조치로 동유럽 경제도 비상이 걸렸다. 이들은 유럽연합(EU) 소속이지만 구소련 출신 국가인 탓에 러시아가 최대 수출시장이기 때문이다. 자누스즈 피에초친스키 부총리는 최근 "올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수출이 전년보다 각각 7%와 26~29%씩 급감할 것"이라며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의 3.6%에서 0.6%포인트 하향 조정했다. 체코 성장률도 올 1·4분기 전분기 대비 0.8%에서 2·4분기 0.3%로 떨어지고 헝가리 성장률도 1.1%에서 0.7%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동유럽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당장 금융시장이 타격을 받고 있다. 최근 시장 조사업체인 EPFR글로벌에 따르면 동유럽 국가의 주식 및 채권을 매입하는 펀드 자금에서 순유출된 자금은 8월 첫주 동안만 6억6,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외국인 자금이 탈출하면서 헝가리 포린트화와 체코 코루나화, 폴란드 즈워티화 등의 통화 가치도 급락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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