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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노인들을 구슬려 싸구려 물품을 비싸게 팔아치운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는 이야기는 이제 대단한 뉴스거리도 못 된다. 방송·신문을 통해 여러 번 다뤄지면서 노인들을 꾀고 달래고 협박하는 방식으로 물건을 강매하는 그들의 수법은 대부분 다 탄로가 났다. 하지만 피해는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만 해도 파악된 피해자가 75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도대체 왜. 뉴스에서 말하듯 어르신들이 흥겨운 분위기와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 탓일까. 영화 '약장수'의 시선은 조금 다르다.
특별한 기술도 없고 신용불량자라는 딱지마저 붙은 일범(김인권 분)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벌이가 괜찮다며 친구에 소개받은 일자리는 어르신들을 상대로 건강식품 등을 비싸게 팔아넘기는 일명 '약장수'. 가난하지만 나쁜 짓 않고 살아왔다는 그의 은근한 자부심은 아픈 딸아이 앞에서 결국 무너지고 만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뭐 그리 대수랴. 낯부끄러운 노래자랑이나 해괴한 분장, 어르신들에 '엄마'라고 소리치며 살갑게 달라붙는 애교... 낯설기만 했던 모든 것에 일범은 금세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곳을 찾은 옥님(이주실 분). 검사 아들을 두고 장한 어머니로 상까지 받은 옥님은 '홍보관'이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빤한 사기 행각이 벌어지리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홀로 사는 외로움에 지쳐가던 옥님은 우연히 들른 그곳에서 모두와 함께 웃고 떠드는 즐거움에 어느덧 푹 빠진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에 상냥히 말을 건네던 일범이 곤경에 처하자 냉정함을 잃는다. 스스로 손을 들고 물건을 사준 마음 약한 옥님은 약장수들의 좋은 먹잇감. 이야기는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슬픈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영화의 장점은 선과 악을 뚜렷이 규정짓지 않는 모호함에 있다. 일범과 옥님의 관계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틀에 규정되지 않는다. 사실 둘의 관계는 돈을 매개로 한다는 점만 빼면 '저 아이가 바라는 것은 다 해주리라'고 다짐하는 '엄마'와 그 호의에 기대 살아가는 '아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실업과 고독사 등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여러 자극적인 소재가 등장하지만 다루는 방식 또한 건조하고 담담한 편이다.
그런 탓에 혹자는 이 영화에 대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부모의 외로움을 일부러 모른 척해온 우리가 거짓 효도에 속아 넘어가는 부모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지켜보며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아들을 향해 "나랑 두 시간만 놀아줄래. 팁도 줄게"라고 말하는 부모를 어떤 얼굴로 바라봐야 할까.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그 기묘한 죄책감이 영화를 보는 동안 가슴에 조금씩 쌓인다. 23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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