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는가, 아니면 시작부터 악한가. 이 오래된 질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에서 정치·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중요하고도 소모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단지 개인의 대인관계 방법론의 문제가 아닌, 집단 혹은 국가의 형성과 지속에 관련된 중요한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생물·문화적 측면에서 그 문화를 연구하는 인류학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통상 학계에서는 장 자크 루소의 입장을 견지해왔다. 쉽게 말해 '자연상태의 인간은 비폭력·이타적이고 친절'하다는 것이고, 다만 식량과 연료, 물 공급과 항구, 재산 등 물질적 자원의 부족이 전쟁을 낳는다는 논지였다. 17세기 영국시인 존 드라이든이 그의 영웅비극 '그라나다의 점령'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제목 '고결한 야만인'도 문명에 오염되지 않고 선천적으로 착한 본성을 지닌 원주민을 가리키는 단어다.
하지만 미국 인류학자 나폴리언 섀그넌은 이는 '몽상'일 뿐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한다. 오히려 만성적인 전쟁상황에서 언제 공격 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는 것이다. 루소보다는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제시한 혼돈, '인간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에 더 가깝다.
그가 근거로 드는 것은 지난 1964년부터 35년간, 짧게는 수주에서 2~3개월까지 총 5년 정도의 기간을 함께 살며 연구한 야노마뫼족. 이 부족은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국경지대, 흔히 아마존으로 통칭되는 오지에서 살아온 원시부족이다. 섀그넌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들이 오랜 기간 외부인의 접촉 없이 고립된 채 살았고, 그 덕분에 외부의 질병이나 식민주의 시대 학살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조차 들어올 수 없는 곳에 있어, 말 그대로 그들만의 관습과 문화가 원형을 유지한 셈이다.
부족 2만명 정도가 250여개 마을에 흩어져 사는 가운데 왜 크고 많은 전쟁이 그렇게 많았을까. 원인은 대부분 가임기의 여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가 무엇이었건 마찬가지다. 아직 국가 성립 이전의 부족 단계에서 부족원의 수는 마을의 군사력, 생존과 안전에 직결되는 문제다. 특히 남자 전투원의 확보는 필수적이었다. 전투나 노동력에 도움이 안된다는 이유로 당장 불필요한 여아에 대한 영아살해가 빈번하게 이뤄진다. 그러니 성비는 맞지 않고 강한 마을은 상대적으로 약한 곳에서 여성을 강탈해오는 데 집중하게 된다.
종족은 인구가 많아지면 일부가 독립해 새로운 마을이 생긴다. 같은 종족도 마을이 다르면 전쟁이 벌어진다. 이에 따라 그저 같은 종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장되지 않는 정치적 안전을 강화하려는 노력 속에 부계혈통의 중요성이 극대화된다. 타 부족과의 경쟁에서 내부적으로 잘 결속된 부족원을 확보하려는 이유에서다. 같은 아버지와 형제라는 유대감은 어떤 관계보다 배신의 가능성을 낮추고, 이는 일부다처제에 대한 선호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소외된 남성 부족원들에 대한 불만은 다른 마을에서의 여성 납치로 소화한다.
이렇게 형성된 끈끈한 유대감은 정치적 영향력으로 작용하고, 이는 결혼과정에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강한 마을의 남자 부족원이라는 점, 특히 마을 내 부계혈통의 남자 친척이 많을 수록 결혼이 수월했고 다수의 아내를 거느릴 확률도 높았다. 정치적 영향력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딸을 가진 부모 역시 그런 사위를 선호했다. 그래서 반대 경우, 약한 마을의 배경 없는 남자는 다른 마을에 가서 일정 기간 천대 받으며 일하고 아내를 얻는 '봉사혼' 밖에 방법이 없었다.
섀그넌은 친족 집단의 내부결속은 구성원의 숫자와도 상관성이 높다고 말한다. 40명 남짓한 집단은 말 그대로 대가족적인 위계질서만으로 충분하지만, 80명을 넘어서면 정치적 지도자(족장)의 역할이 커진다. 150명을 넘어서면 족장의 태도는 한결 강경해지고 질서 유지를 위해 협박과 물리적 강권을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중간 마을 규모인 200명 정도면 억압적이고 전제적인 성격까지 띤다. 400~500명 규모의 큰 마을에서는 대부분 무자비한 수준에 도달하고 만다.
그렇게 족장에게 쏠리는 권력은 필수적으로 여성을 사이에 둔 갈등을 조장했다. 실제로 마을 규모가 조금 커지면 더 많은 여성을 소유하려는 다툼이 벌어졌고, 일부가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독립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돌아서면 남이 되고 만다. 2만명 남짓한 부족원간에 대부분은 부모 양쪽의 사촌이나 팔촌으로 얽혀있었음에도, 혈통보다는 그때그때의 이익에 따라 동맹이 결성됐고 그나마도 손바닥 뒤집듯 배신하는 구조였다.
1966년 이같은 내용을 담은 박사논문이 발표되자, 그의 주장은 인류학계에서 큰 반발을 불러왔다. 대표적인 문화인류학자 애슐리 몬터규는 이에 대해 생물학적 요인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한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라고 반박한다. 나아가 인간의 생물학적 측면은 '문화과정'과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같은 반향은 19세기 에밀 뒤르켐이 사회학을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들고 나오자 기존 학계가 반발하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억지 논리와 비방에 지친 섀그넌은 이 책을 통해 문화인류학계의 고집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학자를 위협하고 억누르며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저질렀다고 비판하는 친목단체"라고까지 비난한다. 또 이에 동조해 애매한 표현의 논문만을 내놓는 많은 인류학자들에게는 "기존 지식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사상경찰이자 인류학계의 아야톨라(이슬람 시아파 최고지도자)들에게 미움과 비난을 받지 않으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을 이어가고 있다고 쏘아 붙인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