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불을 붙이고 일본이 퍼뜨린 글로벌 환율전쟁의 불길이 세계경제를 승자 없는 공멸로 몰고 갈 것이라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환율마찰을 피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공조도 사실상 물 건너간 가운데 일부 선진국들의 대규모 돈 풀기로 통화가치가 오르는 국가들의 경제를 망가뜨리는 것은 물론 환율전쟁을 일으킨 당사국 경제도 파국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경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2일(현지시간) CNBC에 따르면 유로퍼시픽캐피털 최고경영자(CEO)인 피터 시프는 "다른 전쟁과 달리 환율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승자가 죽게 된다"며 미국이 환율전쟁에서 승리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경제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유도한 달러약세가 부메랑이 돼 가파른 인플레이션 압력이 미국경제를 짓누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경제는 회복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저금리와 양적완화 덕분에 겨우 붕괴되지 않고 있을 뿐"이라며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미국경제는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역시 아베 신조 내각 출범 이후 디플레이션 타개라는 명분 아래 미국과 같은 무기한 양적완화를 선언하며 엔화가치를 끌어내렸지만 결국 디플레이션보다 큰 상처를 안은 '승자 아닌 승자'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DJ FX트레이더의 외환전략가인 빈센트 시그너렐라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실린 기고에서 "일본은 한국 등 경쟁국보다 많은 돈을 풀어 엔화를 약화시킬 것"이라면서 "일본이 환율전쟁에서는 승리하겠지만 일단 인플레이션이 통제를 벗어나면 이는 훨씬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성장이 뒤따르지 못하면 일본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하의 물가상승)에 발목이 잡힐 것"이라고 내다봤다.
공격적인 돈 풀기의 희생양이 되는 환율전쟁의 패전국이 당할 경제적 타격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엔저 피해에 시달리는 한국은 물론 프랑스와 중남미 신흥국 등이 모두 환율전쟁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는 국가들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환율전쟁의 공포가 중남미로 번져 칠레ㆍ페루ㆍ콜롬비아 등 각국에서 통화가치 상승에 대응하기 위한 보호무역주의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제조업이 수출의 75%를 차지하는 멕시코의 경우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보다 선진국발 환율전쟁에 대한 우려가 깊다. 아구스틴 카르스텐스 멕시코 중앙은행 총재는 최근 선진국들의 양적완화에서 비롯된 대규모 자본유입이 "경제에 '퍼펙트스톰'을 일으킬 것"이라며 "자산가격 버블 우려가 재연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일부 선진국들이 초래한 글로벌 환율전쟁의 먹구름이 전세계를 뒤덮기 시작한 가운데 15~16일 주요20개국(G20) 재무장관ㆍ중앙은행총재회의가 열리는 러시아 모스크바는 환율전쟁의 격전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프랑스와 한국 등 신흥국가들은 사실상 일본에 대한 성토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G20 회의에서는 환율갈등을 잠재우기 위한 해결책이 나오기는커녕 공감대가 형성될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갈등의 진앙지인 일본이 "금융완화는 엔저를 노린 것이 아니라 디플레이션 타개정책일 뿐"이라는 주장을 반복하고 앞서 양적완화에 나선 미국과 영국 등은 이를 은근슬쩍 두둔하는 분위기에서 G20 차원에서 특정국을 겨냥해 한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앞서 발표된 G7 성명 내용에 대해 시장에서 상반된 해석이 나오며 오히려 외환시장의 혼란을 부추긴 점을 미뤄볼 때 G20 회의가 갈등과 혼란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앞서 G7은 환율이 시장원리로 결정돼야 하며 "목표환율은 배제돼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지만 일본 재무상이 이를 "G7 이 '아베노믹스'를 인정했다"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면서 시장에 큰 혼란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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