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환율전쟁에서 미국은 늘 핵심 키를 줬다.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힘이다. 슈퍼파워 미국의 힘은 곧잘 횡포로 연결됐다. 일본이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극심한 디플레이션에 빠지게 된 것도 달러화의 급격한 절하를 합의한 지난 1985년 플라자 협정에서 비롯됐다. 최근 세계 환율분쟁도 중국의 저평가 환율정책 유지가 주요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경기를 부양하려는 미국의 돈 풀기(양적완화)에서 촉발됐다. 미국은 무역역조가 심해지거나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십분 활용, 달러 움직임을 사실상 쥐락펴락하면서 난국을 풀어갔다. 미국발 환율전쟁의 타깃은 일본에서 이제 중국으로 바뀌었다지만 견제 방법은 예전과 다르지 않다. 일본이 지난 1980년대 엄청난 무역흑자에 힘입어 경제강국으로 부상할 조짐을 보이자 미국은 급격한 엔화절상을 통해 기를 꺾어놨다. 마찬가지로 미국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위안화 절상 압박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중국은 일본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중국은 일본과 달리 미국으로부터 정치ㆍ군사적 지원을 받아온 게 아니기 때문에 희생을 감수하면서 경제적으로 협조할 이유가 없다. 중국은 특히 일본이 과거 강제적인 통화절상으로 어떤 경제적 시련을 겪었는지도 잘 알고 있다. 여기에 외환시장 거래규모가 플라자 합의 당시 하루 6,000억 달러에서 지금은 4조 달러로 크게 팽창하는 등 변화된 환경은 외환시장 개입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다. 최근 글로벌 환율전쟁의 결과가 끝내 어떻게 결론 날 지, 오는 21~22일 한국 경주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ㆍ중앙은행 총재회의와 오는 11월 G20 서울 정상회의를 앞두고 관심이 모아진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여전히 글로벌 환율문제를 주도할 것으로 전망하지만 과거 플라자 합의처럼 힘에 의한 반(半) 강제적 해결은 불가능 할 것으로 점치고 있다. ◇ 환율합의 역사, 미국의 팔 비틀기 =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인 G5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성명서 채택에 합의했다. "달러 가치를 내리고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를 크게 올린다" 였다. 당시 제임스 A. 베커 미 재무장관은 4개국 대표들에 미리 준비한 방안을 들이밀어 불과 20여분 만에 반강제로 약달러 용인 동의를 얻어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냉전시대 미국의 정치ㆍ군사적 동맹국인 일본과 독일이었다. 엔화는 2년간 달러당 237엔에서 143엔으로 65.7% 절상됐다. 마르크화도 같은 기간 57% 올랐다. 미국은 지난 1979년 2차 석유파동과 강달러 정책 등에 따른 무역역조 심화를 이처럼 정치적으로 해결한 것이다. 미국은 달러가치가 지나치게 떨어지자 반대의 합의까지 이끌어 냈다. 지난 1987년의 루브르 합의와 1995년 역플라자 합의가 그 예이다. G6는 지난 1987년 2월 프랑스의 옛 루브르 궁에 있는 재무성에서 희의를 갖고 "달러가 이 밑으로 (당시 1달러=150엔) 하락하면 각국의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내놓았다. 달러가치가 플라자 합의 이후 계속 하락해 당시 미 경제에 대한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달러약세 지속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불만을 반영한 조치였다. 더욱 강력한 달러가치 부양책은 1995년에 나왔다. 지난 1995년 4월 18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79.75엔을 기록했다. 이에 G7은 다음 달 미국 주도로 달러강세 유도에 뜻을 모아 시장개입을 단행했고 엔화는 이후 달러당 148엔대까지 오르게 된다. 플라자 합의와 성격이 반대여서 '역플라자 합의'로 불린다. 당시 엔화가 초강세를 보였던 것은 달러가치의 급락 때문이었다. 1994년 말 멕시코가 금융위기로 정권이 붕괴하자 멕시코에 익스포저(위험노출)이 많았던 미국 금융계에도 불안감이 확산, 달러가치가 급락하는 사태를 맞았다. 전세계 경기가 호조인 상황에서 미 정부는 자본수지 흑자를 통한 경상수지 개선을 위해 기존의 약달러 정책에서 강달러 정책으로 돌아선 것이다. ◇ 힘 빠지는 미국 = 2000년대 들어 미국이 환율문제에서 예전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를 여지는 많이 사라졌다. 지난 2003년 9월 G7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모임을 갖고 "경제 펀더멘털을 반영한 유연한 환율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G7은 이를 바탕으로 엔화 및 유로화 강세(달러 약세)를 추진키로 했지만 과거 플라자 합의 때처럼 공조를 통한 외환시장 개입에 나서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 엔화와 유로화의 절상 폭은 2년간 각각 3.5%, 9.2%에 머무는 등 충격이 예전만큼 크지 않았다. 이 때도 환율분쟁의 기본 축은 미국과 일본이었다. 미국은 지난 2001년 정보통신(IT) 버블의 붕괴로 경기침체를 맞자 약달러 정책(엔화 및 유로화 강세)을 폈고 이에 일본은 잦은 외환시장 개입으로 맞섰다. 반면 글로벌 외환시장의 환경은 크게 달라졌다. 일일 외환시장 거래규모가 플라자 합의 당시 6,000억 달러인 반면 두바이 합의 때에는 1조9,000억 달러로 늘어났다. 게다가 국제 외환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로 떠오른 중국의 경우 당시 고정환율제를 택했기 때문에 환율조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쉽지 않았다. 미국이 두바이 합의를 통해 얻은 성과는 일본의 외환시장 개입을 중단시키고 중국이 이후 관리변동환율제를 도입하도록 한 정도였다. ◇ 힘에 의한 환율조정 불가능 = 환율분쟁은 '내가 이기면 상대방은 지는' 제로섬(zero-sum) 게임이다. 미국의 편의에 의한 환율문제 해결은 다른 나라들의 피해를 불러온다는 얘기다. 플라자 합의에 따른 일본의 오랜 고통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역사를 비춰볼 때 중국이 미국의 압박에 못 이겨 위안화 대폭 절상을 단행할 가능성은 크기 않다. 유용딩(餘永定) 전 중국 인민은행 통화정책위원은 "중국은 일본의 경험에서 배웠다"고 말했다. 더구나 전세계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이미 통화 및 재정정책을 상당히 소진한 상태이다. 이 때문에 수출증대에 혈안이 된 주요 국가들이 미국 돕기에 적극 나설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현재 외환시장 거래규모가 하루 4조 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기축통화국인 미국도 국제공조 없이 혼자 힘으로 외환시장을 좌지우지하기는 그다지 쉽지 않다.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 총재는 이달 초 IMFㆍ세계은행 연차총회를 앞두고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플라자 또는 루브르 합의가 나올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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