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반인 풍문여고 3학년 9반. 오전10시 A4용지로 된 수능성적표를 든 담임교사가 교실에 들어서자 방금까지 새로 산 화장품과 최근 푹 빠져 있는 드라마를 놓고 왁자지껄 떠들던 학생들은 순간 조용해졌다. 담임교사가 부드럽게 '성적표 왔다'고 운을 뗐지만 학생들은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자, 1번부터". 처음 호명된 학생은 곧 울어버릴 듯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다른 학생들도 같은 기분인지 '아…'하며 일제히 탄성을 쏟아냈다.
"나 등급 떨어졌어. 100% 떨어졌어. 수시 어떡해" "아 미치겠네. 엄마한테 어떻게 보여주지"
일부는 성적표를 받자마자 바로 반으로 접고 다른 얘기를 하거나 울음 섞인 얼굴로 책상에 엎드리기도 했다. 분명 제 이름이 적힌 성적표를 받아 들었지만 결과를 못 믿겠는 학생들은 "어떡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침통한 분위기 탓에 수능 등급 컷을 맞춘 학생들도 애써 기쁜 기색을 숨겼다. 나호연(18)양은 "정시를 준비한 친구들한테는 좋은 소식을 듣지 못했다"며 주변 상황을 설명했다.
가채점보다 수학등급이 떨어진 이모(18)양은 "이미 수능으로 받은 쇼크는 받을 대로 받았다"며 "한 달 동안 마음 정리를 하니 오히려 담담해졌다"고 했다. 그는 "화를 낸다고 해서 점수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낮은 대학에 가도 그 뒤에 노력하면 인생이 더 잘 풀릴 수도 있지 않겠어요"라고 반문하며 어른스럽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수학에서의 1점 차이로 등급 컷을 맞추지 못한 이양은 수시 대신 정시 지원을 해야 하지만 이양과 같은 중상위권에는 정시는 더욱 어렵다. 이양은 아직도 쉬운 수능에 대한 불만이 크다.
수능 성적표가 통지되고 나니 물수능 여파가 문과보다는 이과, 최상위권보다는 상위권·중위권 학생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일선 교사들의 목소리다. 윤희태 영동일고 진로진학교사는 "의대를 지망하는 최상위권 학생들의 경우 변별력이 있지만 서울 주요대 등 상위권 대학의 경우는 언어·수학·외국어 성적이 거의 만점에 가까운 상태에서 과탐점수가 합격을 가르게 돼 학생들이 더욱 혼란스러워한다"고 설명했다.
서울 강남 대치동에 있는 휘문고 등 일부 자사고 이과반의 경우 언수외 1등급을 받은 학생이 십여명에 달하기도 해 상위권의 성적 가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종찬 휘문고 진학지도부장은 "올해 수능처럼 상위권 점수가 촘촘하게 붙어 있는 상황에서는 대학·과 서열이 파괴되고 뒤죽박죽되는 상황이 나올 수 있다"며 "어려운 상황이지만 소신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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