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SectionName(); [오늘의 경제소사/9월10일] 대 이란 경제봉쇄 권홍우 편집위원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1951년 9월10일, 영국이 이란에 대한 경제봉쇄령을 내렸다. 상품수출과 원유수입을 금지하고 금융거래도 동결시켰다. 민족주의자 모사데그가 총리에 선출된 직후인 1951년 5월 단행한 석유 국유화에 대한 보복으로 맞불을 놓은 것이다. 영국은 경제봉쇄 이전에 이란에 대한 즉각적인 군사작전을 모색했으나 미국에 막혔다. 한국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중동산 원유의 40%를 생산하던 이란이 싸움터로 변할 경우를 두려워한 미국은 영국의 군사행동을 말렸다. 이란은 영국이 떠나도 순익의 25% 지급과 고용승계, 원유의 안정적 공급을 보장했지만 영국은 어느 것 하나 받아들이지 않고 2차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함대를 보냈다. 이란은 봉쇄로 고통을 겪었다. 하루 66만배럴에 이르던 원유생산이 경제봉쇄 이후 2만배럴로 떨어져 경제난에 시달렸다. 이란은 왜 국유화에 나섰을까. 영국의 폭리 탓이다. 영국이 원유 판매순익의 70%를 챙기는 구조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터.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계 석유회사와 이익을 절반씩 나누는 이익반분협정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에 같은 협정을 요구했으나 '허튼 소리'라는 반응을 받고는 국유화에 매달렸다. 영국의 대응은 용공혐의 조작. 총리직에 복귀한 처칠은 첫 임기를 맞는 미국의 아이젠하워와 손발을 맞춰 1953년 '아직스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이란군부 쿠데타를 사주해 모사데그 총리를 쫓아냈다. 석유도 되찾아 미국과 영국이 각각 40%, 나머지는 프랑스와 네덜란드계 석유회사가 나눠먹었다. 경제봉쇄는 옛날 얘기가 아니다. 영국이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와 다른 점도 있다. 끝까지 버티겠다는 이란의 태도가 그렇다. 미국과의 대립구도에는 1953년에 당했다는 학습효과가 깔려 있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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