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2월28일, 미국 의회가 블랜드-앨리슨법(Bland-Allison Act)을 통과시켰다. 골자는 보조화폐로서 은(銀)의 부활. 재무부가 매월 200만~400만달러어치의 은을 매입해 금화와 1대16의 비율로 교환되는 동전을 주조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법 제정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의회 의결과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의회 재표결 과정을 겪었다. 왜 그랬을까. 금융과 국제무역ㆍ제조업의 중심지 북동부와 농업ㆍ광산업이 주력인 서부ㆍ남부 간의 해묵은 갈등이 ‘금과 은의 대결구도’로 표출됐기 때문이다. 기선을 잡은 측은 남북전쟁 승리의 여세를 탔던 북동부. ‘금본위제도 시행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국제적 신용도를 높이는 첩경’이라며 1873년 화폐주조법을 개정, 은화 주조를 중단했다. 농부와 광산업자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토지나 비료와 관련된 비용이 거의 들지 않았던 당시 영농 여건에서 농산물 가격 상승을 초래하는 인플레이션을 축복이라고 여겼던 농부들은 은화 공급확대를 강령으로 삼는 정당까지 만들었다. 갈등은 블랜드-앨리슨법이라는 절충점을 낳고 1890년에는 은 구매를 대폭 늘리는 법까지 마련됐으나 문제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이 현실화했다는 점. 공급확대로 은 가치가 떨어졌음에도 금화와 교환비율이 고정된 탓에 금이 가치축장 수단으로 여겨지며 장롱 속으로 사라져갔다. 금 부족이 불황으로 이어지자 의회는 1893년 은 구매법을 폐지했으나 세기말까지 후유증에 시달렸다. 유럽의 흉작과 미국의 풍년, 뉴욕 은행가들의 적절한 개입이 없었다면 공황은 더욱 오래 지속됐을지도 모른다. 금과 은을 둘러싼 미국의 화폐금융사는 불안정한 통화는 불황을 심화시킨다는 점을 말해준다. 원화가치가 날이 갈수록 떨어져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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