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양반들 어디가. 거긴 낡아서 사람들 잘 안 가는 곳이야.”
서울 중구 황학동 재래시장 초입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횡단보도 앞. 불현듯 낯선 목소리가 발길을 붙든다. 목소리가 새어나온 곳은 횡단보도 바로 옆 골동품 상점 안. 진열대 위 먼지가 쌓인 장식품 만큼이나 아이러니한 한 마디였다.
#1 황학동 이야기-먼지가 수북이 쌓인 낡은 도시
일명 ‘주방거리’로 통하는 황학동 만물시장. ‘만물’이라는 단어가 주는 분주한 느낌에 걸맞지 않게 11일 오전, 시장은 고요했다. 매일 아침 좌판을 펼치는 상인들의 일상 뒤로 누렇게 색이 바란 천막, 낡은 간판이 도드라진다. 가장 높은 건물이 3층. 작고 낡은 건물들이 키재기를 하는 사이 외벽의 갈라진 틈에는 검은 때가 꼈고 커진 균열 속에서는 뼈대가 드러났다. ‘늬우스’, ‘모오타’ 등 간판에 새겨진 단어에서 세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최근 서울경제신문이 단독 입수한 ‘전국 도시쇠퇴지역 현황(국토연구원, 2014)’에 따르면 황학동은 ▲인구감소 ▲사업체감소 ▲노후건축물(준공 20년 경과) 증가 등 쇠퇴지역 지표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노후화지역(쇠퇴지역)이다. 황학동 일대 건물 중 준공 후 15년 이상이 경과한 건물은 전체 면적의 87%를 차지한다. 현재 국토건축관련 법에서는 20년 이상 건축물을 노후 건축물로 규정한다.
시장을 끼고 있는 마장로 5길 건축물 대부분은 1987년 이전에 생긴 건물들. 1956년에 신설돼 60년 가까이 증축하거나 개조한 이력이 전혀 없는 건물도 있었다.
황학동 일대(왕십역 인근)는 조선시대부터 주거 밀집지역으로 발달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가내수공업을 하는 소규모 공장들이 주거지 사이로 파고 들었다. 196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서울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던 당시에도 황학동은 가장 붐비는 지역 중 하나였다. 1962년 건축법, 도시계획법도 황학동 발달에 한몫했다. 그러나 도시가 커질수록 황학동의 시대는 저물었다. 특히 서울시가 청계천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점포와 노점상 이주가 이어졌고 황학동 인구는 1980년2만2,000명에서 지난해 1만3,000여명으로 급격하게 줄었다.
최소 수 개월은 문을 연 적이 없어 보이는 낡은 가게들 사이에서 철물점을 운영 중인 오상택(56) 씨. 그는 황학동에서 태어나고 자라 줄곧 만물시장을 지킨 토박이다. 오 씨는 “나야 신축 건물로 바뀌면 좋지만 이곳 사람들 70~80%는 찬성해야 재개발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면서 ”서로 의견차가 커지면서 자살한 사람까지 있었다“며 혀를 찼다. 1990년대 들어 재개발 논의가 무르익었지만 엇갈리는 이해 속에 황학동은 스무해전 모습 그대로 멈춰버렸다. 아니 낡아버렸다.
#2 문래동 이야기-잦아드는 기계 소리
황학동이 주거 밀집지역에서 소공인들의 터전이 된 곳이라면 문래동 일대는 애초부터 ‘기름밥’을 먹는 이들이 모여 만든 공업단지였다. 그러나 지금의 문래동은 황학동과 마찬가지로 쇠퇴지역 지표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노후화지역이다.
문래역 7번출구에서 200여m 떨어진 문래동 철강단지. 해가 기울기 시작한 오후 5시께에도 쇳덩이 가는 소리가 간간히 새어나왔지만 거리에서 인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허름한 건물 사이로 가공을 기다리는 다양한 굵기의 철강재들이 너부러져 있을 뿐이었다.
국내 대표적인 철강단지인 영등포구 문래동은 1980년대 근대 산업화의 중심지였다. 1960~1970년대 각종 공장과 철강소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그 배후지역에 주택들도 대규모로 자리 잡았다. 1980년대에는 서울, 경기 일대 철재 공급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철강산업의 부흥으로 문래동 일대 공장과 철공소에선 기계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토지가격도 크게 올랐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오랜 기간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장비와 먼지 쌓인 철판 그리고 빈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깨진 창문들, 걸쇠 조차 없는 낡은 문, 방치된 사무실은 문래동의 현재를 대변한다. 1980년대말부터 경기도 시화 등에 철강단지가 새롭게 조성된 데다 값싼 중국산 철강제품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이 일대 공장들은 입지가 좁아졌고 결국 상당수가 문래동을 떠났다. 인력부족과 약해진 가격경쟁력에 휘청이던 업체들도 하나 둘 문을 닫았다. 영등포철강연합회에 따르면 등록업체수는 1995년 290여 개에서 2000년대 들어 140여개로 급격히 줄었다. 20년 동안 철강업체를 운영해온 이승래(48) 씨는 “20년 전 문래동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돈 많이 벌었지만 지금은 인건비도 많이 올랐고, 인력도 부족해서 시화공단이나 외부지역으로 하나 둘 빠져나가고 있는 상황”이라며 “20년 전과 비교해서 60% 정도의 공장들이 사라지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했다”고 설명했다. ‘문래동에선 마음만 먹으면 탱크도 만든다’는 우스갯소리도 옛 사람들의 흰소리로 남았다.
지금 문래동 사람들의 바람은 빈자리가 채워지는 것이다. 최근에는 경제적 부담으로 홍대를 떠난 예술가들과 소상인들이 낡은 철공소를 새단장하며 둥지를 틀고 있다. 문래동에서 50년 동안 거주한 한옥자(75) 씨는 “50년 전, 내가 시집왔을 당시 이곳은 주택단지 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철재공장들이 하나씩 생기더니 어느새 철강단지로 바뀌었다“며 ”그런데 최근 5년 전부터는 철공장들이 사라지더니 그 자리에 갤러리, 카페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3 가락동 이야기-재개발 그리고 떠나는 사람들
8호선 송파역 주변의 가락1동 일대는 앞서 살펴본 황학동, 문래동과는 사뭇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4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5층 높이의 공사장 안전펜스. 그 옆으로는 ‘임대문의’라고 대문짝만하게 쓰여진 현수막들이 내걸린 저층 건물들이 이어졌다.
서울시에 따르면 가락1동은 최근 5년간 인구 감소폭이 가장 큰 지역(읍·면·동)이다. 가락1동 인구는 2009년 1만5,996명에서 2015년 현재 1,114명으로 92% 가량 줄어들었다. 무려 이 기간동안 1만4,882명이 가락1동을 떠난 것이다.
인구가 크게 줄어든 배경에는 가락시영아파트 재건축이 있다. 송파구청에 따르면 시영아파트 재건축을 위한 철거작업이 시작되면서 가락1동 인구의 95%에 달하는 6,600세대가 빠져나갔다. 1982년에 준공된 시영아파트는 재건축 논의가 시작된지 10년만인 2013년 거주자 이주 명령이 떨어졌고 현재 철거작업은 약 80% 완료된 상태다.
가락1동의 흥망성쇠는 시영아파트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불어나기 시작한 가락1동은 1997년 8호선 가락시장역이 개통되면서 주요 거주밀집지역으로 꼽히기 시작했다. 공영도매시장인 가락시장이 커질수록, 상업지역이 확대될수록 사람들은 더욱 몰렸다. 가락1동에서 30년 넘게 슈퍼마켓을 운영해온 이삼규(74) 씨는 “과거만 해도 이 지역은 명동 못지 않게 사람이 붐비던 곳이었다”면서 “특히 가락시영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사람과 건물이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가락시영아파트 철거작업이 진행되면서 바뀐건 인구만이 아니었다. 주변 상권도 급격하게 침체됐다. 주로 미용실, 옷가게, 학원 등을 비롯한 상업시설들이 타격을 받았다. 7년동안 미술학원을 운영해온 임상묵(50)씨는 “아파트 철거작업이 진행되면서 옆에 있던 은행과 미용실이 잇달아 문을 닫았다”면서 “미술학원 수강생들 역시 3~4년전에 비해 절반 이상 줄었다”고 말했다.
시영아파트 옆 석촌재래시장의 상인들도 가게 문을 하나 둘씩 닫고 있다. 뜸해진 발걸음에 문을 다시 열 날도 기약이 없어졌다. 27년째 반찬가게를 꾸려온 박경희(57) 씨는 “7~8년전에는 많은 인파가 몰리며 도깨비 시장이라고 불릴 정도였지만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어 하나 둘씩 이곳을 떠나고 있다”면서 “예전에 비해 가게 수가 3분의 1정도 감소했다”고 푸념했다.
#늙어가는 서울, 도시재생에 대한 고민
중구는 쇠퇴지역 비율이 100%에 달했고 성동구(94.1%), 광진구(93.8%), 서대문구(56.2%), 관악구(90.5%) 순으로 높았다. 막대 그래프는 쇠퇴지역 지표에 해당하는 동 수다.
서울시 423개 동 가운데 322곳이 도시쇠퇴지역으로 조사됐다. 서울의 76.1%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국토연구원이 지난해 조사한 ‘전국 도시쇠퇴 지역 현황’을 토대로 분석한 것이다. 최근 30년간 인구가 가장 많았던 시기에 비해 20% 이상 감소하거나 최근 5년간 3년 이상 연속으로 인구가 감소한 지역, 최근 10년간 총 사업체 수가 가장 많았던 시기에 비해 5% 이상 감소하거나 최근 5년간 3년 이상 연속으로 사업체 수가 감소한 지역 등이다. 또 전체 건축물 중 준공 후 20년 이상 지난 노후건축물 비중이 50% 이상인 지역도 해당된다. 3가지 중 2가지만 충족해도 쇠퇴지역이다.
서울 자치구별로 보면 중구(쇠퇴율 100%)의 경우 15개 동 전체가 쇠퇴지역으로 나타났고 △성동구 94.1%(17개 동 중 16개) △용산구 93.8%(16개 중 15개) △서대문 92.9%(14개 중 13개) △관악구 90.5%(21개 중 19개)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부촌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 서초구 서초1~3동·잠원동·방배1~4동 등은 국내 최대 부촌 가운데 한 곳으로 꼽히지만 도시 쇠퇴 지표인 노후건축물 증가와 인구감소가 동시에 집중되며 노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이들 지역은 준공 후 20년 이상 지난 건축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이상이다.
서울 전역에서 급격한 노후화가 나타난 배경에 대해 전문가들은 지나친 재개발, 재건축 의존을 꼽고 있다. 도시 재생은 마을 만들기, 노후 건물 개보수, 미니 재건축 등의 형태로 진행할 수 있는데도 불도저식 개발에만 의존하면서 부작용만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국내에서도 2013년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며 도시 재생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됐지만 아직까지도 방향성을 찾지 못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구자훈 한양대 도시대학원 교수는 “도시 노후화를 막기 위해서는 영국과 일본 등 도시재생을 오랜 기간 진행해온 나라들처럼 국내도 공공의 행정 지원과 세금혜택 등의 유인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은영기자,
▼이 기사는 본지 권경원 기자의 단독 기사 <도시가 늙어간다>를 모티브로 제작됐습니다. (아래를 클릭하시면 기사로 이동합니다.)
[단독]도시가 늙어간다(1)[도시가 늙어간다] 서울 부촌도 예외 없이 노후화… 담양·구례 등은 쇠퇴율 100%
▼도시 재생에 관심이 생겼다면 서울경제 창간기획 <한국형 도시재생의 길을 찾다>를 읽어보세요. (제목을 클릭하시면 기사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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