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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생각 주머니… 사회이슈 담아 알리는 게 작가 도리"

[Culture & Life] 미디어아티스트 강애란



보자기 소재로 여성의 삶 표현하고 디지털북 작품으로 인류 지성 탐구
국내뿐 아니라 해외서도 큰 관심

신사임당 등 역사속 여성에서 위안부 할머니 문제까지 주목
인문학적 시각으로 작품 만들 것



올망졸망 예닐곱 살 아이들을 모아 앉힌 유치원 선생님이 "버스를 그려보자"고 했다. 크레파스를 손에 쥔 어린이들은 각자의 스케치북에 버스를 그리기 시작했다. 네모난 몸통에 바퀴가 달린 제법 그럴싸한 버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생님은 그중 한 소녀를 칠판 앞으로 불러내 버스를 그리게 했다. 그런데 아이는 한참이나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분필을 손에 쥐었으나 그리지는 않았다. 선생님이 왜냐고 묻자 아이는 "칠판이 너무 작아서 그릴 수가 없다"며 "내 커다란 버스가 들어서기에 칠판이 너무 작다"고 대답했다. 그림은 눈에 보이는 형상만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는 점을 아이는 일찍이 깨우치고 있었다. 훗날 아이는 화가가 됐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림이나 조각 같은 전통적 미술방식을 뛰어넘어 새로운 매체로 작품을 만드는 '미디어아티스트'가 됐다. 강애란(사진)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교수다.

버스를 그리지 않았을 뿐이지 결코 그림을 못 그리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그림을 아주 좋아했고 급기야 미술을 더 하고 싶다며 부모를 졸라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화여대에서는 서양화를 전공한 뒤 '더 큰 그림'을 꿈꾸며 유학을 준비했다. 뉴욕에서 1년 수학한 후 일본 다마미술대 판화과로 진로를 결정했다. 다마미술대는 한국 출신의 작가 이우환이 지난 1973년부터 교수로 재직해온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대다. 그가 입학하던 1980년대 초중반 한국에는 '판화 붐'이 일었고 강 작가 역시 다른 매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파내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목판·동판과 달리 붓질로 그린 것을 화학처리해 판화로 제작하는 석판화가 잘 맞았다. 그림도 실컷 그리고 판화로도 만들 수 있어 흥미로웠다.

당시 강 작가가 즐겨 다루던 소재는 '보자기'였다. 1986년 도쿄 시로타갤러리와 서울 두손갤러리 개인전에서 보자기 작품을 처음 선보였다.

"보자기는 펼쳐놓으면 사각의 평면이지만 묶으면 입체의 주머니가 되죠. 내게 보자기는 '생각 주머니'입니다. 삶의 희로애락부터 다양한 관념을 보자기에 담아 묶은 것이었죠. 드러나는 형상은 보자기일 뿐이지만 그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들이 담겨 있어요. 동시에 보자기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과도 떼놓을 수 없습니다. 단단한 소재의 입체작품으로 보자기를 만들었더니 절대 풀 수 없고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더군요. 이는 마치 사회에 팽배한 남존여비 사상이나 결코 풀리지 않을 고정관념을 떠올리게 하죠."

나이가 들면 생각이 많아지듯 전시를 거듭할수록 '생각 보자기'는 점점 커졌고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보자기 작업을 한 지 10년 이상 지난 어느 날 무형(無形)의 생각을 싸던 보자기로 유형(有形)의 책을 쌌다. 책 또한 인간의 생각을 담은 '생각 주머니'로 여겼기 때문이다.

"1998년작 '우리의 이야기(our stories)'는 투명한 보자기로 책을 감쌌던 작품이고요. 마침내 그 보자기를 풀어버려 책이 드러나면서 제 작품은 '보자기'에서 '책'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자기든 책이든 둘 다 내게는 물건이 아니라 '비물질적 생각'을 담은 하나의 '공간'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공간인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삶과 지식이 농축된 시간의 응집체이고요. 따라서 책은 넓이·부피 같은 물질적 요소뿐 아니라 시간을 함축한 가상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매트릭스 같은 디지털 개념의 공간으로 책을 다루고 있습니다."

2000년 무렵부터 강 작가는 '책'의 형태와 기능을 빌려 '인류의 지성사'라는 대주제를 연구하듯 파고들었다. 책이라는 소재는 동서고금 미술에 다양하게 등장하지만 그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이른바 '디지털 북' 프로젝트다. 그의 책은 속을 채운 인류의 지성이 마치 계몽의 빛과 외침을 내놓듯 빛과 소리까지 보여줬다.

2006년 금호미술관 개인전에서는 관객이 선택한 책에 따라 다른 음악이 흘러나오고 책의 영상이 벽에 투사됐다. 미디어아트 전문미술관인 독일 ZKM에서 2008년 전시할 때는 5m짜리 입방체를 만들었는데 관객이 책장에 꽂힌 책 가운데 하나를 뽑아들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그 책의 내용이 영상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책 읽어주는 예술작품'으로 예를 들어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의 책을 들고 들어가면 그의 작품세계가,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책을 갖고 가면 그의 색면 추상화가 나타나는 방식이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미술계에서도 관심이 높아졌다.

"빛은 책 속에 시간이 담겨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차용한 소재예요. 빛이 있으니 존재감 또한 드러나죠. LED가 나오기 한참 전이라 EL이라는 얄팍한 광원소재를 사용했어요. 어떤 분들은 고도의 신기술이냐고도 묻지만 개념적으로는 디지털 가상공간을 받아들였기에 '디지털 북'이라고 부를 뿐 나의 '빛나는 책'이 추구하는 것은 아날로그입니다. 읽고 삶과 지식을 얻는 원래의 책처럼요."

15년을 '책'으로 작업한 그가 28일 개막한 서울 통의동 시몬갤러리 개인전에서는 달라졌다. 이번 전시에서 강 작가는 역사 속 여성에 주목했다. 그간 보여준 것이 인류사의 총론이었다면 이제는 각론이 시작됐다.

"지성사는 남성의 이야기가 주류이고 숭고한 존재로 접근한 책은 모양도 내용도 서구적 성향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고 한국의 여성이잖습니까. 3년 전 개인전 이후 우리 역사를 돌아보기 시작해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연구했어요. 신사임당은 자신의 주체성보다는 현모양처로서 남성중심의 사회가 본받을 만한 여성상으로 제시해놓은 본보기 인물의 성격이 강합니다. 반면 허난설헌은 '유선사'라는 작품에서 자신을 신선세계의 주인공으로 세우는 등 주체성을 가진 여성이며 동생 허균 때문에 중국·일본에서 더 유명한 진보적 여성이더라고요."

이들과 관련된 책은 두루마리나 묶음 형태의 전통적 책의 형태로 신작이 됐다. 나아가 작가는 조선 여성을 탐구하던 눈으로 근대를 바라봤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여성가족부, 나눔의 집, 정신대대책협의회 등을 찾아다니며 조사했다.

"나눔의 집에 다녀오던 날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1988년에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1991년에는 김학순 할머니가 형언 못할 고통을 최초로 증언했습니다. 그런데도 1990년까지 일본에 살았던 저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데 통탄했어요. 작업하던 중 배춘희 할머니가 한(恨)을 풀지 못한 채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배 할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영상작품으로 담았습니다.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저는 이 사실을 작가적 시각으로 풀어 세상에 알리고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고 또 후세에 남기는 것이 교육자이자 작가로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강 작가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모아 적히지 않은 역사를 책에 담았다. 전시장 2층에는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가 생전에 즐겨 부르던 '소녀 아리랑'이 구슬프게 울려 퍼진다.

"위안부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에 옛날 작업인 '풀 수 없는 보자기'처럼 답답하더군요. 정신적으로 힘들지만 의미 있는 일이라 앞으로도 과학과 미술의 결합처럼 인문학자들과 협력해 사회적 이슈를 작품에 넣어갈 생각입니다. 우선은 진보적 여성에 대한 연구를 더 할 거고요. 미술의 역할에서 '재현'뿐 아니라 '제언'도 중요하니까요."





She is…

△1960년 서울



△1979년 서울예고 졸업

△1983년 이화여대 서양화과 졸업

△1987년 일본 다마미술대 석사

△2001년 아트선재센터 개인전

△2006년 금호미술관 개인전

△2008년 스페인 세비야비엔날레

△2009년 일본 다마미술대 박사

△2009년 독일 ZKM미술관 그룹전

△2010년 중국 난징비엔날레

△2011년 갤러리시몬 개인전

△2012년 국립중앙도서관 개인전 '디지털북 도서관 프로젝트'

△1994년~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교수






남몰래 비영리 전시공간 운영 '산타 교수님' … "전시장 이름 비밀이에요"

강애란 이화여대 조형예술학부 교수는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비밀리에' 비영리 전시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08년부터 일명 '서촌'인 통의동에 작은 건물의 세를 얻어 전시공간으로 사용해왔다.

전시장 운영을 총괄하는 디렉터를 따로 둬 강 교수가 직접 작가와 만나거나 전시를 기획하는 일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까운 지인 일부를 제외하면 강 교수와 '그곳'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사를 통해서도 전시장 이름이 공개되면 안 된다는 당부를 거듭했다. 그는 매달 나가는 월세와 관리비를 꼬박꼬박 챙겨주고 있다. 서촌은 경복궁을 사이에 둔 북촌과 더불어 문화상업지구로 급부상하며 임대료도 오르는 추세지만 벌써 7년째 이름없는 '산타' 노릇은 계속되고 있다.

강 교수는 "우연한 기회에 작은 전시공간이 임대물건으로 나온 것을 알게 됐는데 우리 학생들을 위해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학생들이 치열하게 살게끔 기회를 주고 도와주고자 공간을 운영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그는 "예전에는 작가가 그림만 잘 그리고 작품만 좋으면 되는 줄 알았지만 이제는 작가가 작업뿐 아니라 스스로 기획안도 내고 홍보도 할 줄 알아야 한다"며 "전시를 위해 포트폴리오를 제출한 것을 보면 학생들 각자가 치열한 경쟁에서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고 있는 게 보여 흐뭇하다"고 말했다.



사진 이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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