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신흥재벌(올리가르히), 정계 실세 40여명과 비공식 만찬을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서구권 제재 및 저유가로 러시아 루블화가 속절없이 추락하던 시점의 일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환율대책을 설명하며 "정부는 기업들을 도울 것이다. (그러니) 기업들도 정부를 도와달라"고 말했다. 뉴스위크는 푸틴의 이 말이 "올리가르히들은 국가 구제에 나서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쫓겨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라고 전했다.
최근의 루블화 불안 사태로 푸틴 대통령과 올리가르히들 간의 공생관계가 흔들리고 있다. 겉으로는 굳건해 보이는 이들 사이가 현재의 경제위기로 나눠 먹을 파이가 줄어들면서 내부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잠시 주춤해진 금융불안이 심화할 경우 이들 혹은 정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친위 쿠데타(palace coup)'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전망조차 나온다.
미 CNBC방송은 최근 보도에서 "푸틴의 최측근 올리가르히들은 그들의 엄청난 부와 영향력을 푸틴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그들은 자기 분야·자원을 전략적으로 운영하면서 푸틴의 권력을 단단히 떠받치고 있다"며 "우울한 경제 뉴스에도 불구하고 단기적으로는 이 시스템이 그럭저럭 유지돼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전했다.
최근 푸틴·올리가르히 간 유착관계가 단적으로 드러난 것은 러시아 국영 석유기업 로스네프트와 금융당국 간에 이달 중순 이뤄진 모종의 거래다. 저유가에 따른 이익급감과 서구권 제재로 돈줄이 막힌 로스네프트는 최근 100억달러 규모의 루블화 표시 채권을 발행했고 러시아 국영은행은 이를 대거 사들였다. 당시 환율추락이 나라 경제에 치명상을 입히는 와중에 오히려 루블화를 대량으로 찍어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행위를 정부 당국이 자행한 것이다.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CEO) 이고르 세친은 푸틴의 최측근으로 러시아 내 제2의 권력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1990년대 초 푸틴의 상트페테르부르크시 정부 근무시절부터 관계를 쌓아온 블라디미르 야쿠닌 러시아철도공사(RZD) 사장도 화끈한 지원을 받았다. 오는 2018년 러시아월드컵 개최도시와 모스크바, 중국 베이징 등을 연결하는 거대 철도 프로젝트에 800억달러 규모의 국영웰빙펀드 자금 일부를 지원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야쿠닌 사장은 러시아 최대 종교인 러시아정교회와 푸틴의 가교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한때 푸틴의 유도 파트너였던 건설업계 올리가르히 아르카디 로텐버그 또한 정부 프로젝트를 잇따라 수주하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최근 블룸버그에 따르면 로텐버그는 올해 초 열린 소치동계올림픽과 관련해 70억달러 규모의 계약을 따낸 데 이어 최근에는 시베리아의 신규 천연가스 송유관 건설 수주를 앞두고 있다.
푸틴은 이의 반대급부로 이들을 자기 권력 강화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특히 19일 크렘린궁 만찬은 푸틴이 재임 15년 만에 가장 큰 위기인 루블화 사태를 해결하는 데 올리가르히들을 어떻게 동원하는지 보여준 전형적 사례로 꼽힌다. 당시 푸틴 대통령은 정부와 기업 간의 '돈독한 관계'를 강조하며 참석자들을 향해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이로부터 나흘 후 러시아 당국은 주요 국영 수출기업들에 현재 보유하고 있는 외화를 매각하라고 지시했다. 올 들어 달러 대비 50% 넘게 폭락했던 루블화 가치는 이 같은 일련의 조치가 내려진 뒤 지난주 10% 이상 올랐다.
다만 철옹성처럼 보이는 푸틴과 올리가르히들 간의 관계가 계속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영국 가디언지는 "최근의 경제불안으로 올리가르히들 사이에 나눠 먹을 돈이 줄어들고 있고 이와 관련해 크렘린궁 엘리트들 간에 분열 조짐이 일고 있다"며 "러시아 석유(왕국)의 붕괴로 푸틴을 위협할 친위 쿠데타가 발생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 푸틴의 최측근으로 분류됐던 알렉세이 쿠드린 전 재무장관은 최근 트위터에 "루블화 가치하락은 정부 경제조치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푸틴의 경제실정을 비판하고 나섰다. CNN머니에 따르면 푸틴의 최측근 올리가르히 15명이 올해 러시아 경제부진으로 500억달러 상당의 자산을 잃었다. 반면 뉴스위크는 "올리가르히들이 보유한 현금 대부분은 외국계 은행에 외환 형태로 안전하게 보관돼 있다"며 "모스크바 거부들은 현재 괜찮아 보인다"고 보도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달 중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로부터 '잠재적 친위 쿠데타(궁정혁명) 가능성 때문에 두렵지 않으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푸틴은 조소에 가까운 미소를 보이며 "러시아에는 '궁정(palace)'이라는 게 없다. 따라서 궁정혁명도 있을 수 없다"고 받아넘겼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