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조심스럽게 시작한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일단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글로벌 증시와 외환시장이 조기 테이퍼링에도 극심한 혼란을 보이지 않자 전문가들은 금융시장이 미국 출구전략의 첫 단계를 소화해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제 금값이 온스당 1,200달러 밑으로 급락하고 미국의 중장기 국채금리가 치솟는 등 미국의 통화정책 방향 선회에 대한 불안감은 곳곳에서 불거지고 있다. 당장은 양적완화 축소 규모가 월 100억달러 수준에 그친데다 연준이 양적완화 지속에 대한 강력한 선제안내에 나서면서 시장의 동요를 최소화했지만 앞으로 계속되는 추가 테이퍼링 변수에 시달려야 하는 글로벌 금융시장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이다.
블룸버그통신 조사에 따르면 이코노미스트들은 연준이 내년에 예정된 7차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각각 100억달러씩 테이퍼링 추가 축소 조치를 취해 내년 말까지 양적완화를 종료할 것으로 보고 있다.
테이퍼링에 속도가 붙을수록 글로벌 '머니 무브'가 가시화하면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금값 약세와 미 국채금리 상승에 더해 신흥국으로부터의 자금이탈과 달러화 강세 등 테이퍼링의 잠재적 리스크들은 금융시장에 점차 큰 부담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연준의 발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금값이다. 5년간 지속된 연준의 돈 풀기로 달러화 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오르는 데 대한 '보호책'으로 안전자산인 금을 사들였던 투자자들은 올해 들어 연준의 출구전략 조짐이 보이자 진작에 금에서 손을 털기 시작했지만 연준이 정책 방향을 틀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금 매도 속도를 한층 높였다.
이날 금값은 전날보다 3.3% 하락하며 3년 만에 1,200달러 밑으로 떨어졌다. 금값은 올 들어 29%나 빠져 지난 1981년 이래 가장 큰 낙폭을 보이고 있다. 더블라인캐피털의 제프리 셔먼 원자재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연준의 테이퍼링 돌입으로 "더 이상 금을 보유하고 있을 이유가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크레디트스위스의 전망을 인용, 내년에도 연준이 풀었던 돈을 거둬들이면서 금값 하락 추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테이퍼링 여파로 미국의 장기금리도 다시 출렁이기 시작했다. 이날 10년 만기 미 국채금리는 장중 2.95%까지 치솟아(국채가격 하락) 3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다만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이 실업률이 목표치를 달성해도 초저금리를 유지하겠다는 강력한 선제안내에 나선 덕에 지난 9월5일 돌파했던 3%대를 넘지는 못한 채 2.93%로 마감됐다.
그러나 선제안내 '약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 BofA메릴린치는 앞으로 미국 경제지표가 개선되고 연준의 추가 테이퍼링이 속도를 내면 연준의 선제안내만으로 금리 상승 압력을 억제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의 금리상승은 전세계로 흘러들어간 양적완화 자금을 미국으로 되돌려 놓으면서 달러화 강세와 신흥국 자금이탈을 부추기는 재료다. 지난 5월 버냉키 의장의 양적완화 시사 발언 이후 수개월간 지속된 신흥국으로부터의 대대적인 자금이탈은 미국의 금리상승에 대한 기대만으로 글로벌 자금이 얼마나 민감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신흥국 외환위기 가능성이 제기될 정도로 큰 충격을 한 차례 겪은 시장은 이번 테이퍼링 발표 이후에는 그나마 차분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브라질 헤알화가 1.2% 하락하고 타이 밧화와 필리핀 페소화,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등도 일제히 약세를 보였지만 낙폭은 작은 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화는 오히려 0.2% 올랐고 5월 이후 가장 호된 자금이탈을 겪었던 인도 루피화도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수개월 전과 같은 급격한 자금이탈이 아니더라도 달러화 자산으로의 중장기적인 '머니 무브'는 불가피하다고 강조한다. 당장 20일 일본의 엔화 가치는 장중 달러당 104.44엔으로 추가 하락하며 2008년 10월6일 이래 5년2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시장에서는 출구전략으로 들어선 미국과 달리 일본은행이 내년에 추가 완화정책을 내놓으면서 엔·달러환율이 달러당 115엔까지 오를(엔화가치 하락)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특히 경상적자와 정치불안 등 불안요인이 큰 신흥국발 자금유출은 불가피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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