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째 지속되고 있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가 유럽 정치 지형도를 뿌리째뒤흔들고 있다.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극심한 실업률과 치솟는 재정적자가 정권의 운명을 엇갈리게 만들고 있으며 분노한 시민들은 좌우라는 이념성향에 관계없이 기존 집권층에 과감히 레드카드를 들이밀고 있다. 이념을 중시했던 과거를 미련없이 떨쳐버리고'문제는 경제야'라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내년에 미국 등 각국에서 열릴 선거판에서도 경제문제가 최대 이슈로 떠오르면서 표심을 잡기 위한 정치지도자들의 경쟁구도에도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20일 외신들에 따르면 이날 치러진 스페인 총선에서 마리아노 라호이(56)가 이끄는 보수 야당 국민당(PP)이 45%의 지지율로 전체 의회 의석 350석 중 186석을 확보해 110석에 그친 집권 사회당을 누르고 7년만에 정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스페인에서 경제위기 주범으로 몰린 현 집권 사회당이 참패하면서 재정위기국으로 지목된 포루투갈과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등 이른바 PIIGS 국가의 집권 정부가 모두 무너졌다. 이들 국가는 하나같이 재정위기 악화로 한때 국채 수익률이 7%대를 넘나들며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모습을 보여 '7% 국채수익률'이 정권 교체의 새로운 기준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스페인 사회당이 지난 1970년대 프랑코 독재정권이 붕괴된 이후 최악의 참패를 당한 것은무엇보다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간 주범으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사회당이 정권을 잡은 지난 2004년 이후 스페인 경제는 경기 부양 바람을 타고 승승장구하는 듯했으나 부동산 시장 거품 붕괴로 저축은행(카하)들이 잇달아 무너지면서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지난 3ㆍ4분기 스페인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제로를 기록했고 실업률은 20%를 넘어섰으며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은 9%에 이른다. 스페인 뿐만 아니라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PIIGS 집권정부도 모두 경제에 발목이 잡혀 무너졌다. 지난해 구제금융을 받았던 아일랜드는 올해 2월 총선에서 집권 공화당이 물러나고 14년만에 보수 우파 정당인 통일아일랜드당이 정권을 잡았으며 포르투갈도 지난 6월 치러진 총선에서 중도 우파 성향의 사회민주당(PSD)이 집권 사회당을 누르고 승리했다. 긴축재정을 밀어붙이다 국민들의 반발에 직면한 그리스는 총리가 사임하고 거국 내각을 구성했으며 잇단 성추문과 부패 혐의에도 17년간 이탈리아 정계를 주물러온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도 결국 재정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죄로 물러나고 말았다. 전문가들은 재정위기 심화로 유로존 정권교체가 봇물을 이루겠지만 새로 들어선 정권들도 특단의 대책이 없는 데다 긴축재정을 두고 국민과의 갈등이 불가피해 위기가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새로 들어선 정권이 시장에 충격을 줄 만한 새로운 해법을 들고 나오지 않는 데다 긴축 재정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 개혁을 밀어붙이기 쉽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국민당의 마리아노 라호이 당수는 재정적자를 현 9%에서 2012년까지 4.4%까지 줄인다는 공약을 내세웠지만 부채 삭감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또 은행권 구조조정과 지방정부 예산 지원 삭감 공약을 내걸었지만 국민들의 반발을 의식해 정작 중요한 연금과 건강보험 분야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고 선언해 시장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국채 전문 투자 전략가 니콜라 스피로는 "라호이 당수가 긴축재정 및 경제 개혁에 시동을 걸 수 있으나 투자자들의 심리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국민당의 승리가 예상되면서 지난 17일 스페인 10년물 국채 수익률은 구제금융 마지노선이라 일컬어지는 7%에 근접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도 경제전문관료를 총리로 맞아들여 경제개혁에 대한 의지를 내비쳤지만 우려는 가시지 않고 있다. 강도높은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정치권의 도움이 필수적이지만 정치권과 연결 고리가 없는 관료들이 개혁을 밀어붙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특히 내년에만 1월 핀란드, 4월 프랑스, 10월 슬로베니아에서 대통령 선거가 예고돼 있지만 정권 교체가 성사되더라도 확실한 개혁안을 들고 나올 정치 세력이 출현할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젓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정권 교체를 통해 개혁에 성공한 나라는 아일랜드 정도"라며 "나머지 국가들의 전망은 여전히 밝지 않다"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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