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첫 여성 의사. 국제여성대회에서 양성평등 결의안을 채택시킨 선구자.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의 인생 초반부다. 1870년 8월31일, 고위직공무원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몬테소리는 유별났다. 남자의 전유물이던 기술학교 진학을 고집, 부친의 속을 태웠다. 의대에 지원했을 때는 여성의 입학 허용을 놓고 사회적 논쟁까지 일었다. 인생 항로가 바뀐 것은 의대를 졸업한 1896년. 갓 배치된 어린이 정신병동에서다. 창살에 갇혀 동물처럼 취급받는 아이들에게 교육기회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 몬테소리는 개혁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지체아 교육방법을 공동연구하던 동료의사와 사랑에 빠진 것도 이 무렵이다. 아들을 낳았지만 미혼모를 천시하던 풍토에 따라 핏덩이를 유모에게 보낸 몬테소리는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해 1904년 로마대학 인류학 교수로 취임했다. 자기 아이에게 쏟지 못한 사랑은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졌다. 1907년엔 교수직을 던지고 빈곤층 자녀를 위한 ‘어린이의 집(Casa dei Bambini)’을 열었다. 교육의 요체는 ‘놀이를 통해 아이가 스스로 배운다’는 것. 교사는 관찰자에 머물렀다. 결과는 대성공. 몬테소리 교육법은 전세계로 퍼졌다. 1922년에는 무솔리니의 눈에 들어 장관급 교육감독관을 10년간 지냈다. 1952년 타계(72세)하기 전 3년 연속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지만 선정되지 못한 것도 파시즘 동조 논란 때문이었다. 몬테소리 교육의 인기는 갈수록 높아진다. 문제는 변질. 천재를 만드는 조기교육으로 인식된 탓이다. 한국의 연간 유아교육비만 3조원. 돈이 없으면 소외되는 구조와 잠재능력을 발굴 당하느라 학원을 순례하는 아이들을 몬테소리가 본다면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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