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가 3일(현지시간) 상대적으로 생산원가가 높은 미국의 셰일가스 산업을 압박하기 위해 대미 원유수출 가격을 인하하기로 하면서 산유국 정상을 다투는 두 나라 간 '벼랑 끝 대결'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4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사설에서 "미국·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들이 과잉생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계획을 굽히지 않아 글로벌 원유시장이 치킨게임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국제유가는 세계적 경기침체 등의 여파로 지난 6월 대비 20% 이상 하락했지만 사우디와 북남미대륙 등의 주요 산유국들은 서로 세계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려 생산을 늘리고 가격을 인하하는 등 물량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석유 메이저들이 물량전을 강화하면서 최근 유가는 심리적 마지노선인 베럴당 80달러선(서부텍사스산원유·WTI 기준) 밑으로 추락했지만 상대적으로 고비용 구조인 셰일가스 등에 집중하는 미국은 아직 더 견딜 수 있다며 배짱을 부리고 있다.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4일 정례 브리핑에서 "전략비축유 확대 등을 포함해 낮은 유가와 관련해서는 어떠한 검토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낮은 유가가 미국 경제에 득이 된다고 말했다. 미국 셰일 업체들도 감산 조치 등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노스다코타의 주요 셰일 업체 중 하나인 휘팅페트롤리엄 관계자는 WSJ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동안 초과공급과 지정학정 위기 등을 지속적으로 견뎌왔다"며 아직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상당수 애널리스트는 배럴당 70달러을 하회하지 않는 한 감산은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우디의 3일 수출 가격 인하 선전포고는 이같이 버티고 있는 미국에 한번 해보자며 맞불을 놓은 격이 됐다. 실제로 사우디는 아시아 등 다른 지역에 대한 원유수출 가격을 12월부터 인상하기로 하면서도 유독 미국에 대해서만 수출 가격 인하 방침을 밝혔다. 당초 일부 경제전문가들은 사우디의 원유 바겐세일이 또 다른 산유국인 러시아를 고사시키려는 서방과의 합작품이라는 음모론을 내놓기도 했지만 이번 수출 가격 인하로 진정한 표적은 미국이라는 본심을 드러낸 것이다.
양국의 바겐세일 공세 속에 국제유가도 연일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4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12월 인도분 WTI는 전날보다 1.59달러(2.02%) 떨어진 배럴당 77.19달러로 2011년 10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런던 ICE선물시장에서 브렌트유는 전날보다 2.01달러(2.37%) 내린 배럴당 82.77달러로 2010년 10월 이후 최저치를 나타냈다.
그러나 마냥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온다. 로이터통신은 "모든 산유국이 시장 점유율 지키기에 나선다면 (유가 급락 같은) 의도치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며 "어느 시점에서 석유수출국기구(OPEC)든 비OPEC 산유국이든 감산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장 관계자들은 이번주에 열리는 사우디와 베네수엘라 석유장관 회담 결과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국제유가 하락으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가 치킨게임에서 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시에테제네랄의 마이크 위트너 애널리스트는 "일각에서 제기하는 감산 문제과 관련해 사우디는 OPEC 산유국들이 감산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베네수엘라 같은 산유국이 이에 응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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