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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자연에 새겨진 인공의 기하학적 문양이 신비로움과 전율을 주기도 한다.
충남 천안 우정힐스CC의 13번홀(인코스 4번홀)은 인공이 가미된 북미식 웨스턴 코스의 전형이다. 인공 연못에 동그란 그린이 섬처럼 떠 있다. 연못 가장자리와 그린의 테두리는 빈틈없이 박은 침목으로 깔끔하게 마감됐다. 침목이 놓인 가느다란 다리가 섬과 뭍을 연결할 뿐이다. 단순함의 극치가 심미성과 맞닿을 수 있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파3홀로 꼽히는 미국 플로리다주 소그래스TPC의 17번홀이 떠오르지 않는가. 우정힐스CC를 설계한 페리 다이는 소그래스TPC 개조를 맡았던 아버지 피트 다이로부터 받은 영향을 한국에 남기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꼭 20년 전 이곳은 국내 최초의 아일랜드 그린으로 화제가 됐었다.
가로 34m, 세로 26m로 완벽한 원형에 가까운 아일랜드. 당초 콘셉트는 그냥 팬케이크 같았다고 한다. 가장자리 벙커는 모기업인 코오롱 이동찬(91) 명예회장이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설계자에게 유일하게 고집을 부려 양보 받은 것이다. 이 회장은 "너무 가혹하다"고 주장했고 방어용 벙커 3개를 만드는 것으로 절충됐다. 연간 이 홀에서 수장(水葬)되는 볼의 수가 그나마 약 1만5,000개로 줄어들게 된 순간이었다.
이 홀에는 85야드부터 221야드까지 5개 거리의 티 박스가 있다. 충분한 비거리를 확보하는 게 필수지만 너무 길어도 문제다. 그린 후방에는 벙커도 없다. 싱글핸디캡의 수준급 골퍼인 이정윤 우정힐스 총 지배인은 "한 클럽 길게 잡고 그린에서 깃대를 지워야 한다. 그린 가운데를 향해 부드럽게 휘두르면 볼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늘 홀 전체를 휘감아 돌며 부는 바람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
이 홀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한국오픈 골프선수권대회다. 내셔널 타이틀이 걸린 한국오픈을 후원하는 코오롱은 2003년부터 이 우정힐스CC에 고정해 개최해왔다.
이 홀에서 볼을 빠뜨려도 실망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있다. 어니 엘스, 비제이 싱, 이시카와 료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어서다. 이시카와는 일본의 신성으로 떠오른 2009년 한국오픈에 출전했다가 1~3라운드 내리 물에 빠뜨려 더블보기를 적어냈다. 남상수(89) 남영비비안 명예회장은 물에 빠지지도 않고 양파(더블파)를 기록한 일화를 남겼다. 두터운 친분의 이 회장과 동반 라운드 중 티샷이 물 수제비를 뜨고 가운데 벙커에 빠졌다. 벙커에서 친 샷이 오른쪽 벙커에, 세번째 샷은 그린을 지나쳐 왼쪽 벙커에 들어가면서 3타를 잃었던 것. 거의 20년 전의 일이지만 두 기업인의 우정의 샷 대결이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우정힐스의 '우정(牛汀)'은 이 회장의 호다.
이 회장의 골프 사랑은 남다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 손길 안 닿은 곳이 없어 조경은 이 회장 작품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서양식 설계에 한국식 조경이 가미돼 지금의 독특한 매력을 갖게 됐다. 매년 한국오픈 때마다 코스에 변화를 줘 한국의 골프코스와 골프대회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따른다. 지난달에는 서울경제 골프매거진이 2년마다 선정하는 2013 한국 10대 코스 2위에 올랐다.
12개의 워터해저드가 16개 홀에 접해 있는 이 골프장은 집중력을 잃는 순간 스코어가 순식간에 불어나는 전형적인 토너먼트 코스다. 승부처는 16번(파3)ㆍ17번(파4)ㆍ18번홀(파5)이다. 한국오픈 때 248야드로 세팅되는 오르막의 16번홀은 그린 앞에 늘어선 3개의 벙커가 치명적이다. 마지막 홀에서는 항상 명승부가 연출된다. 왼쪽으로 휘어진 이 홀은 왼쪽에 버틴 호수를 넘겨 2온을 노릴 수 있지만 짧을 경우 깊이 3m가 넘는 벙커 샷을 감수해야 한다. 어렵기로 치면 9번홀(파4)도 빠지지 않는다. 왼쪽에 긴 벙커와 OB(아웃오브바운즈) 구역이 있어 티샷이 여간 까다롭지 않고 그린 앞과 왼쪽을 막고 있는 벙커는 5m 넘게 푹 꺼져 있다.
우정힐스는 올해도 한국오픈(10월17~20일)에 대비해 13번홀에 대회용 티잉그라운드를 하나 더 만들고 18번홀 그린을 페어웨이 쪽으로 좀더 길게 빼는 등 다시 변신을 한다. "명문은 만들어가는 것이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 회장의 말은 비단 골프코스에 국한시켜 한 말이 아닌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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