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국내 대기업들은 계열사 간의 상호지급보증을 통해 자금을 쉽게 조달해왔다. 공기업들도 부족한 자기자산을 메꾸기 위해 보증을 활용, 정부자산을 사용해왔다. 자기가 만든 신용위험은 자기가 부담해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가 보증이라는 금융기법을 통해 부정되는 것이다.
보증은 법적 계약이므로 쉽게 신용을 끌어올 수 있는 반면 예기치 못한 환경 변화에 의해 쉽게 그 구속력이 변할 수 있다.
차입기업의 신용위험 명확히 판단 가능
자체 신용자산이 부족한 대기업 A가 계열사 B의 거액 지급보증으로 자금을 조달했다고 하자. A의 사업은 유지되는 반면 보증을 선 B의 사업이 크게 악화되는 경우 B에 자금을 제공한 투자자들은 혼란스럽게 된다. 차입기업보다 보증기업의 신용위험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재벌 대기업들이 상호지급보증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 경우 차입기업의 개별적 신용위험보다는 재벌그룹 전체의 특수 요인에 의해 영향 받는 부분이 더 커져 투자자들의 혼란이 가중되고 금융시장을 왜곡시키는 요인이 된다.
또한 보증은 남의 자산을 사용해 채무를 변제하려고 하는 방법이므로 차입자가 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 있다. 남의 자산을 쉽게 사용하는 재미에 빠져 자기자산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게 된다. 따라서 기업 자체의 신용위험이 나빠져 보증에 더욱 의존하게 만드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국내 공기업들은 정부라는 강력한 보증인을 끌어올 수 있기 때문에 그 재미에 안주해 자기자산 관리를 게을리 하거나 심지어 부채를 늘려 신용위험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 공기업은 보증에 의해 신용위험이 관리되겠지만 기업 자체는 부실화되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부담이 된다.
이런 문제점들을 인식,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투자자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보증을 제외할 경우를 상정해 독자신용등급이라는 것을 발표해왔다. 국제 신용평가사에서는 외부 지원 가능성을 고려한 신용등급과 이를 배제한 독자신용등급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장 참여자들에게 객관적인 정보를 추가로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평가요소를 세분화해 오래 전부터 자발적으로 시행해왔다.
반면 국내에서는 외환위기 이후 계열사 지급보증에 대한 규제가 나오면서 독자신용등급을 시도했지만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흐지부지됐다. 최근 금융당국에 의해 독자신용등급 도입이 다시 추진되고 있다. 논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투자자들은 독자신용등급이 발표되면 차입기업의 신용위험을 더 잘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도입을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기업들은 독자신용등급이 기존 신용등급에 비해 크게 하락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는 보증의 부작용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차입기업은 독자신용등급이 기존 신용등급에 비해 크게 하락해 차입금리를 상승시키는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차입금리 급상승 논리는 지나친 우려
그러나 독자신용등급은 보증이 제외될 경우를 가정해서 매긴 신용등급이고 실제 부채계약에는 보증이 포함되기 때문에 필자는 일반 신용등급이 여전히 차입금리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 신용등급의 괴리가 크다면 투자자들은 우려를 표현하겠지만 금융시장은 합리적일 것이기 때문에 감정에 좌우되기보다는 이성에 좌우될 것이라고 믿는다. 오히려 투자자들은 장기적으로 차입기업을 압박해 신용위험관리를 잘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신용등급 도입으로 해당 기업의 차입금리가 급상승한다는 논리는 지나친 우려가 아닐까 싶다. 이보다는 장기적으로 기업의 신용위험관리가 개선되는 효과가 더 클 것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금언을 다시 한번 새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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