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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드림걸즈', '위키드', '맘마미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섹시 여죄수 록시와 벨마, 슈퍼 디바를 꿈꾸는 에피·디나·로렐, 초록마녀 엘파바와 열정의 아줌마 도나·타냐·로지. 이쯤 되면 눈치챘을 것이다. 이들 작품은 모두 여자가 주인공으로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이다. 최정원·옥주현·박혜나·차지연·김선영·전수경 등 대한민국 대표 뮤지컬 여배우들이 맛깔나게 소화한 배역을 미성의 남자가 연기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생뚱맞은 상상일 테지만, 시곗바늘을 서양 중세 시대로 돌린다면 남자 배우의 여자 캐릭터 연기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여배우는 극단의 일원이 될 수 없었다. 크리스토퍼 말로, 윌리엄 셰익스피어 같은 최고의 극작가가 활동하던 연극 황금기였지만, 당시 사회의 인식이나 전통, 여배우에 대한 종교적 태도 탓에 여성에겐 무대가 쉽게 허용되지 않았다.
무대에서 여성을 대체하는 것은 크로스 드레싱(cross-dressing), 자신과 반대되는 성(性)의 옷을 입는 '옷 바꿔 입기'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크로스 드레싱이 자주 등장한다. '베니스의 상인'의 포시아나 '십이야'의 바이올라, '좋으실 대로'의 로잘린드는 극 중 남장을 하는 여자 캐릭터다. 미리 말했듯 셰익스피어 시대는 극단의 여배우가 등장하기 전이었기에, 결국 미소년 배우가 여성 역을 맡은 뒤 다시 남장하는 복잡한 '변신'의 단계를 거쳐야 했다. 당시 이웃 나라 스페인에선 여성의 연극 진출을 금지하는 각종 법까지 있었다. 스페인 교회는 17세기 초반까지도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여성들이 극장 무대에서 춤추는 것을 법으로 막았다고 하니 여배우가 시스루 의상에 관능적인 춤을 추고 때론 음담패설을 거리낌 없이 토해내는 지금의 공연 무대는 개벽처럼 느껴진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자. 최근 만난 한 뮤지컬 배우는 "여자 배우가 주인공으로 설 수 있는 작품은 점점 줄어들어 인기 남자 배우 옆 연인이나 보조적인 역할에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털어놓았다. 그녀 말마따나 국내 뮤지컬 시장은 관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20·30대 여성을 겨냥해 남자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을 쏟아내고 있다. 남자 주인공을 더블·트리플까지 캐스팅하는 작품의 홍수 속에 여배우가 무대 중심에 설 기회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셈이다.
"맞는 말이죠. 그런데 당장 표가 안 팔리는데, 누가 쉽게 공연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라는 제작사 입장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내 씁쓸함이 밀려온다. 남자 주인공의 엄마, 여자친구 역에만 그치기엔 재능 많고 빛나는 무대 위 '그녀'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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