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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94> 동도서기(東道西器)


얼마 전 한 경영학자를 만났습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유학한 그는 경영학에서 동양적 가치를 발현시킬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인수합병(M&A)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했던 그가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갖고 있을까, 궁금해 졌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공부했던 대부분의 학문체계가 서구 사상에 기초해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 사상을 테두리로 생각하는 한 그들의 세력권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맞는 지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사회과학 대부분이 사실은 근대 이후 일본과 중국을 통해 번역된 개념으로 사고하고 있는 분야이니까요. 세계화 시대에 무슨 지역주의냐고 이야기할 법도 하지만, 국가 경쟁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사고의 틀을 가졌느냐가 얼마나 클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무시할 수는 없는 지적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지금은 동양과 서양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이해관계의 각축장을 벌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은 고도미사일방어체계, 즉 사드(Thaad)의 한반도 전진 배치를 문의해 왔습니다. 여기에 대해 중국 정부는 작년 시진핑 주석의 박근혜 대통령 예방을 포함 네 차례에 걸쳐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카드로 과거 ‘아시아 통화 기금’의 구상에 준할 만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구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자기들이 만든 금융 생태계의 일원으로 활동해 달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한 때는 열강에게 분점 당하던 피해자가, 이제는 다시 그들을 위협할 만큼 생태계의 주재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습니다.

앞집과 옆집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사이 우리에게는 흑 아니면 백의 선택지만이 주어졌습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회피를 할 수도 없고, 이사를 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학자들은 편하게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을 띄면서 살아가자고 이야기하지만 그것도 말이 쉽지요.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의존해 있는데, 군사적으로는 미국을 신뢰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이것을 타개하려면 뭔가 새로운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동양의 철학과 가치를 중시하면서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이자는 19세기 말의 개화파들이 주장했던 캐치프레이즈입니다. 사실 이 생각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미국, 프랑스, 청국, 일본 등이 어지럽게 한반도를 드나드는 사이 우리의 기본 전략은 그 기조를 잃어버렸고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만 겨우 생존을 할 수 있을 만큼 폭이 작아져 버렸습니다. 늘 협상에서 경청만 해야 하는 불리한 구도 속에서 국체(國體) 훼손이라는 비극을 맞았지요. 어쩌면 ‘동도’와 ‘서기’라는 서로 상충되는 가치를 제때 구사할 수 있는 감이 없었기 때문에, 무엇이 좋은지도 판별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그냥 누군가에게 집어 삼켜진 것은 아닌가, 비감마저 듭니다.



약자들이 협상할 때 가장 중요한 전략 중 하나가 희소 자원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호혜적인 관계를 주장할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강압을 할 수도 없을 때,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서 여러 사람들의 경쟁 구도를 지켜보는 것만이 제일 유리한 선택이라는 얘기죠. 그조차도 잘 하려면 확고한 자기 입장과 이익, 그리고 관점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동도서기라는 말을 이제는 다시금 잘 살려 봤으면 좋겠습니다.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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