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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관리한 정절…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네

■ 정절의 역사

이숙인 지음, 푸른역사 펴냄


2세기 백제에 '도미(都彌) 부인'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삼국사기 열전 '도미'편에 따르면 백제 개루왕(재위 128~166년)은 이들 부부의 의리와 절개를 시험하고자 도미부인을 유혹했지만 그녀가 꿈쩍도 않아 화가 났다. 왕은 남편 도미의 두 눈알을 뽑고 작은 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보냈다. 그러자 도미부인은 왕의 요청에 응하는 척하다 도망쳐 극적으로 남편을 다시 찾았다. 부부는 배를 타고 고구려로 가 살았다는 얘기다.

도미부인은 우리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정절 여성이다. 이 이야기는 조선 세종대에 편찬된 서민용 '도덕 교과서' 삼강행실도의 '열녀도' 편에 모범 사례로 실렸다. 즉 도미 부부의 한결같은 사랑이 아닌 도미부인의 정절행각에 주목했다는 뜻이다. 이후 조선의 여성은 희생과 고행의 '정절'을 본받기를 요구받았다. 정절을 지킨 아내에게는 국가 차원의 보상이 이뤄졌고, 개가한 과부 등 '정절을 해친' 아내는 국가가 나서서 분노하고 응징한 일도 있었다. 부부 사이의 개인적 도덕인 정절을 국가가 관리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인 저자는 이같은 정절 개념에서 조선시대 역사의 내밀한 원리를 읽어냈다. 정절의 정(貞)은 육체적·정신적 순결을 포괄하는 성적인 의미가 강하고 절(節)은 믿음이나 신의의 사회적 의무 개념에 가깝다. 이렇게 정절을 강조한 유교 이념은 신하의 충절과 아내의 정절을 한데 묶어 정절을 가족과 국가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저자는 조선경국전, 경제육전, 경국대전으로 이어지는 법전의 계보에서 정절이 명문화된 법으로 존재했고, 민간 사회에서도 향약을 중심으로 정절이 '도덕법' 기능을 했음을 확인한다.



한편 정절 문제를 보는 남성 지식인들의 견해는 조금씩 달랐다. 조선 전기 '개가 논쟁'에서는 현실적으로 과부의 개가가 필요한 상황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조선 후기의 '열녀 논쟁'에서 연암 박지원이나 다산 정약용, 혜강 최한기 등은 각자의 관점에서 맹목적인 열녀 찬양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성호사설'을 쓴 이익은 강간과 화간을 구분하는 것이 물리적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거절과 동의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며 꽤 현대적 변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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