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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가인 A씨는 4년 전 2008년 갑작스럽게 닥친 글로벌 불황으로 부도 위기를 겪은 후 우울증에 시달렸다. 부인 B씨가 남편을 치료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서울 강남의 M호텔을 방문했는데, 호텔 로비 양쪽에 걸린 이두식의 대형 회화 '잔칫날(Festival)' 2점을 본 남편 A씨가 그림 앞으로 다가가 한참을 바라보더니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부인 B씨는 놀라움과 반가움에 작가를 찾아내 집에 걸 그림을 구입했고 병원에서도 회복세를 보인다는 진단을 받으며 남편 A씨는 우울증을 극복했다.
화려한 오방색을 사용하는 화가 이두식의 작품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해 심리치료까지 이뤄낸 일화다. 기(氣)와 복(福)을 부르는 화려한 색감의 '한국적 추상화'로 유명한 이두식(65) 홍익대교수의 대규모 개인전이 인사동 선화랑에서 23일부터 열린다. 특히 그의 '잔칫날' 시리즈 중 붉은 색조가 강한 그림은 재물운을 불러온다고 해서 대형 빌딩의 정문과 로비에 걸려 수문장처럼 사람들을 맞곤 한다.
작가 이두식은 1972년 국전(國展)인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을 수상하면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무속신앙의 '무당굿'을 오방색으로 표현한 원색적인 작품은 당시 미술계에 파격과 충격을 안겨줬다. 한국전쟁을 치른 1950~60년대 한국미술계는 화려한 색과 표현을 자제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고 이로 인해 형성된 모노크롬(단색화) 화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차분한 단색들뿐 '강렬한 색채'는 없던 시대였다. 때문에 원색을 사용한 이두식의 시도는 '반항'에 가까웠다. 두각을 보이는 기회인 동시에 논란과 외로움을 불러오기도 했다.
오방색을 사용하게 된 것에 대해 작가는 "일상에서는 백의민족이었지만 혼례 같은 잔칫날에는 최상의 화려한 색을 동원해 축하를 전했고 장례 때는 아름다운 꽃상여를 만들어 망자(亡子)의 평온을 기원할 만큼 우리에게는 탁월한 색채감각이 내재돼 있다"며 "사찰건축의 단청은 물론 샤머니즘과 무당의 화려한 색깔들이 시각적 엑스터시(황홀상태)를 불러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두식의 최근작은 원색에서 수묵화적 분위기로 서서히 바뀌는 중이다. 수묵화 기법과 정신성, 여백에 대한 배려가 그림에서 부각되고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머릿속의 정신성을 끌어내는 수묵화는 추상화의 개념과 같은 맥락이고 여유와 사색을 보여준다"며 "선(線)을 중시하는 동양미술과 면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미술의 차이를 이해함과 동시에 서양에서 시작된 추상화가 동양적 수묵화의 개념과 같은 맥락임을 터득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우리가 수천년을 가져온 예술정신이 있음에도 현대미술이나 오늘날의 미술교육이 서양적 시각에 휘둘리는 것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해야할 때"라고 덧붙였다.
'인사동 터줏대감'인 선화랑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지난해 작고한 김창실 선화랑 회장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기획한 초대전이라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 원혜경 선화랑 대표는 "돌아가신 (시어머니) 회장님이 'K팝과 한류가 인기인데 한국의 미술을 보여주는 이두식 선생이 외국에서만 전시하고 오히려 국내 대규모 전시는 소홀한 게 안타깝다'며 제안해 당초 지난해에 열 계획이었으나 갑작스레 돌아가시는 바람에 올해로 이어져 약속을 지키게 됐다"고 소개했다. 이두식은 1988년 제 5회 선미술상 수상작가로 선화랑과 인연을 맺었고 부산비엔날레 조직위원장으로 바쁜 상황임에도 약속을 지켰다. 전시는 다음달 12일까지. (02)734-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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