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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 전당대회 주자 집중탐구] 김무성 의원

강한 추진력, 야당과의 소통은 장점.

‘보스 성향’ 한계로 작용할 수도


시쳇말로 날고 기는 사람들만 모인다는 여의도 국회에서 ‘대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정치인이 있다. 새누리당의 7·14 전당대회에 출마한 김무성 의원(62)이다. 그의 별명은 ‘무대’다. ‘김무성 대장’의 약칭이다.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 20일 부산에서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해방 직후 전남방직과 신한제분을 운영하며 당대의 거부 반열에 올라선 부친(김용주) 덕분에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건장한 체격으로 주목을 받았던 그는 동네에서 항상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 ‘무대’라는 별명도 그때 붙었다. 그래도 부산·경남 지역 최고 명문이자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배출한 경남중학교에 들어갔다. 그가 평생 정치적 스승으로 모신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중학생 시절부터 시작된 셈이다.

서울로 터를 옮긴 그는 중동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처음으로 ‘정치적 경험’을 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기 위해 서울시내 고교 대표들과 연합시위를 이끈 것이다. 그는 아직도 고교 시절의 시위 경험을 정치에 뛰어들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로 꼽는다.

우여곡절 끝에 한양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그는 졸업 후 곧장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 26세에 동해제강 상무 자리를 꿰찬 뒤, 불과 6년 만에 삼동산업 대표이사직에 올랐다. 성공한 ‘젊은 리더’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1980년부터 그는 정치에 뜻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 광주에서 병원을 운영했던 지인의 처가 쪽이 연락두절 상태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군사독재의 실상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그는 결국 1983년 사업체와 주식 등을 정리하고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 전 대통령을 찾아갔다. 그 뒤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결성하자 창립 멤버로 참여하며 1987년 6·10 항쟁에 뛰어들었다.

투쟁 끝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지만 YS는 김대중(DJ) 전 대통령과의 후보단일화 실패로 낙선했다. 통일민주당과 민주자유당에서 여러 당직을 거치며 절치부심하던 그는 1992년 15대 대선에서 YS를 당선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정치적 체급을 키웠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청와대 민정·사정비서관을 지낸 뒤 내무부 차관까지 올랐다.

청와대와 정부에서 요직을 거친 그가 여의도 국회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996년 15대 총선을 통해서다. 신한국당 소속으로 부산 남을에 출마해 당선된 그는 재선·3선에 성공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이어 원내수석부총무·총재 비서실장·사무총장·최고위원 등을 거치며 정치 역량을 키웠다.

첫 시련은 2008년에 찾아왔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친박근혜계 좌장으로 낙인 찍혀 공천을 받지 못했다. 다행히 부산에서 ‘친박 돌풍’을 일으키며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그는 여의도 복귀 일성으로 “박근혜 대표와 이명박 대통령의 대화합을 이끌어내겠다”고 외쳤다. 더 이상 계파정치의 희생양이 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2010년은 정치인생의 또다른 분수령이 됐다. 2010년 세종시 수정안을 두고 당내에서 의견이 분분할 때 박근혜 대통령(당시 의원)과 다른 길을 갔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했지만 김 의원은 찬성했다. 이후에는 친이명박계 세력의 지원을 받아 집권여당의 원내대표로 추대됐다. 이로 인해 주류 친박계와 멀어진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결국 친박계가 주도한 19대 총선 공천심사 과정에서 물을 먹게 됐다.다만 18대 총선 때처럼 무소속 출마는 하지 않았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백의종군’을 선택했고 새누리당의 총선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 내부에서는 “김무성 덕분에 최소 30석은 건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후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캠프의 총괄선대본부장으로 당에 귀환했다. 캠프 전체에 금주령을 내리고 야전침대를 깔았다. 대선 역시 승리로 이끈 그는 2013년 4·24 재·보궐선거에서 부산 영도에 출마해 국회로 돌아왔다.

그에 대한 평은 다소 엇갈린다. 우선 강력한 추진력과 함께 야당과도 두루 통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김 의원의 협상파트너였던 박지원 전 민주당 원내대표는 “그는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박기춘 당시 민주당 사무총장과 함께 사상 최장기로 진행된 철도노조 파업을 종식시키면서 “이것이 정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그의 ‘보스 성향’이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17대 국회에서부터 정치권에 몸 담았다는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김 의원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YS로부터 정치를 배운 ‘상도동계’의 막내다.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 시대’의 보스 정치를 몸으로 체득한 마지막 정치인이라는 뜻이다. 전대에 출마하면서 변화·미래 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이미지를 지우기는 쉽지 않다.”



<김무성 의원이 걸어온길>

1951년 부산 출생

1969년 ‘3선 개헌’ 반대 시위 주도

1984년 민주회추진협의회(민추협) 창립

1992년 ‘정치적 스승’ 김영삼 대통령 당선

1996년 국회 입성(15대·신한국당·부산 남을)

2005년 한나라당 사무총장 선출

2008년 18대 총선 무소속 출마·당선(부산 남을)

2010년 한나라당 원내대표

2012년 19대 총선 불출마·18대 대선캠프 총괄본부장

2013년 4·24 재보궐선거 출마·당선(부산 영도)

2014년 7·14 새누리당 전당대회 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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