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무대 위엔 누구보다 치열했던 그네들의 삶이 묻어났다. 말(言) 아닌 정적은 오히려 여백을 채우고,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연극 '3월의 눈'은 그렇게 사라져가는 사람과 물건, 그리고 그들의 시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자극적인 대사도, 극적인 사건도 없다. 잔잔하다 못해 무심하게 흘러가는 노부부의 평범한 일상에서 백 마디 대사로도 대체 못 할 아련함을 발견하는 이유다.
'3월의 눈'은 흑백사진에서 튀어나온듯한 오래된 한옥이 무대다. 주인공 장오(신구)와 이순(손숙) 부부가 30년 넘게 살아온 이 공간엔 누렇게 뜬 문 창호지와 깨진 맷돌, 녹슨 재봉틀, 노란 테이프로 칭칭 감은 금 간 화분이 나뒹군다. 세월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이 집은 작품의 핵심 공간을 넘어 장오와 이순의 삶 그 자체다. 손자가 진 빚을 갚기 위해 평생 가꾼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부부, 그리고 이제 곧 헐려 신식 건물에 자리를 내줘야 하는 한옥은 언젠가 떠나야 할 인간의 삶을 비추는 듯하다.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절제의 미덕'은 관객으로 하여금 긴 호흡으로 이야기와 마주하게 한다. 한국전쟁과 이념 대립을 겪어 내며 꾸린 가정, 사회주의 운동에 빠져 집을 나간 아들, 아비 얼굴도 모른 채 자란 손자의 빚잔치… 파란만장한 부부의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무대 위에 드러나지 않는다. 몇 마디 대사에 굴곡진 인생을 녹여낼 뿐이다. 장오가 집을 떠나기 전 집안 곳곳을 어루만지며 읊조리는 대사엔 그의 인생과 온갖 감정이 응축돼 있다. "섭섭해할 것도, 억울할 것도 없어. 이젠 집을 비워줄 때가 된 거야. 내주고 갈 때가 온 거지." 이순이 만들다 만, 애초 완성될 수 없었던 빨간 스웨터를 걸친 채 장오는 요양원으로 향한다. "자네도 이젠 다 비우고 가게, 여기 있지 말고." 3월의 눈이 흩날리는 한옥 툇마루엔 이순의 혼만이 홀로 앉아 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삶의 터전은 아무도 없는 '빈집'이 된다.
그렇다고 마냥 먹먹한 결말은 아니다. 헐려 나간 한옥의 나무가 누군가의 책상, 밥상이 되듯 모든 것을 내주고 떠나는 장오의 뒷모습은 소멸이 아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순환일 테니 말이다. 장오와 이순이 묵은 문 창호지를 떼어내고 새 살을 붙이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애잔하게 다가오나 보다. 29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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