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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연합군의 日 정벌 실패 원인은?

■쿠빌라이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br>■이승한 지음, 푸른역사 펴냄


충렬왕(1236~1308)은 몽골제국인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칸(1215~1294)의 딸과 결혼한 뒤 왕위에 올랐다. 이 때부터 고려왕이 원 공주와 결혼하는 것은 필수 조건이 됐다. 고려 국왕이 원 황제의 사위, 즉 부마가 된 '부마국 체제'는 고려의 국가적 위상이나 정치 운영에 영향을 줬다. 고려 왕은 통치자로서 온전한 권력을 행사하거나 자주권을 수호할 수 없었다. 고려왕의 지명에 몽골제국의 황제나 조정의 입김이 작용했으며 폐위까지도 사실상 그들이 좌지우지했다. 원이 고려왕을 유배하는가 하면 재위 중인 왕이 원의 사신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원으로 압송되는 치욕도 겪었다. 이 같은 원의 간섭기는 공민왕 즉위 초까지 이어졌다. 왕의 수난 못지 않게 큰 국가적 시련은 일본 원정에 동원되는 것이었다. 몽골에게 복속하지 않으려는 일본은 '눈엣가시'였다. 몽골제국이 고려와 부마관계를 구축하고 정동행성을 설치해 고려 내정간섭을 진행한 것은 결국 일본 원정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는 기틀을 다진 것이었다. 고려는 여몽연합군으로서 일본 원정에 참가했다. 하지만 여몽연합군은 실패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태풍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저자는 원정군 내부의 문제를 지적하며 4만에 불과한 여몽연합군의 열세, 남송을 정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몽골이 고려정부에 원정준비를 의존했던 점을 실패 원인으로 꼽았다. 2차 원정 역시 병력은 10만으로 늘었으나 그 수준이 떨어졌고 2차 원정이 지연됨으로써 일본에 7년이라는 대비기간을 준 것 때문에 실패했다고 분석했다. 한편 이 원정으로 인해 고려 정부와 백성은 고통을 겪었지만 농업과 의무병제의 발달이라는 긍정적 효과도 낳았다. 원 간섭기는 활발한 교역으로 인한 문화 선진효과도 가져왔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강건하고 진취적인 역사만이 훌륭한 역사는 아니고 타율적이고 외세에 예속된 역사를 외면할 필요도 없다"면서 "중요한 것은 우리 역사를 정면으로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쿠빌라이칸의 일본 원정과 그 사이에 놓인 충렬왕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저자가 시리즈로 풀어갈 '몽골 제국과 고려' 1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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