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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맥도날드 매장이나 슈퍼마켓에는 유니폼을 입고 젊은 직원들과 섞여 손님을 맞이하는 '어르신'직원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65세 이상 고령자가 전체 인구의 24%에 달하는 초고령사회 일본에서 노인들은 점차 기업들의 중요한 산업 인력으로 고용시장에서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일본뿐이 아니다. 전세계의 60세 이상 인구 비중이 10%에 도달한 지금, 고령사회로 진입한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기업들의 노년 인력 활용은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기업들의 노인 채용이 단순히 저출산ㆍ고령화에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현상은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백수 생활을 하는 20~30대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와중에 기업들이 굳이 고령 구직자에 눈을 돌리는 것은 젊은 세대와는 차별화된 그들만의 강점 때문이다. 한때 '퇴물' 취급을 받던 고령자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온 노하우,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 유연한 근무시간 등으로 무장해 글로벌 산업계에서 '노익장 파워'를 과시하고 있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고령사회로 진입한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노년층 취업시장의 활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전되는 한국의 기업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비스업 중심 노년층 선호기업 크게 늘어= 지난 2010년 이래 미국에서 일자리를 구한 이들 가운데 55세 이상 인구 비중은 무려 70%에 달한다. 장기 추이를 살펴보면 고령자 파워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지난 10년 사이 55세 이상 취업자 수는 1,000만명이나 늘어난 반면 다른 연령층의 취업자 수는 오히려 400만명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미국은퇴자협회(AARP)가 꼽은 '50세 이상을 위한 가장 좋은 직장'에 선정되기도 한 의료서비스업체 스크립스 헬스의 경우 65세 이상 직원의 은퇴 비율이 미국 평균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65세가 넘는 노년층 인력도 회사측이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의미다. 세계 최대의 유통업체인 월마트도 일찌감치 고령자 채용우대 프로그램을 도입해 고령 인력 활용에 적극 나섰다. 미 호텔체인 데이즈인은 전화접수 업무를 주로 고령자들에게 맡기고 있다.
이처럼 고령 취업자가 늘어나는 현상은 물론 전체 인구에서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빠르게 늘어나는 데 따른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기업들 사이에서 고령층 직원을 선호하는 추세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의료ㆍ유통ㆍ숙박업과 같은 서비스업 분야에서는 나이 지긋한 직원 채용을 선호하는 기업들이 크게 늘고 있다.
선진국들 가운데 고령 인력 활용에 가장 적극적인 일본에서도 노인 일자리의 중심은 서비스업이다. 지난 2006년 초고령사회(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이 20% 이상)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일찌감치 음식점이나 소매업체 등을 중심으로 노인 직원들이 늘어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맥도날드에서는 지난 2005년 전국의 매장근무 직원 가운데 60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1.3%에 그쳤으나 현재는 2%(3,400명) 수준으로 늘었다. 중고 주방기기 판매수리업체인 텐포스버스터즈는 고령자 활용을 위해 2005년에 아예 정년제를 폐지했다. 점장을 뽑을 때는 20대부터 60대까지 모든 종업원들이 나이에 따른 차별 없이 실적으로 경쟁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현재 이 회사에서 60세 이상 직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달한다. 히로시마의 전통 제과업체인 도라야는 지난 2008년 정년을 60세에서 70세로 끌어올렸다. 현재 종업원의 40%가 60세 이상인 이 회사는 70세 넘어도 일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직원들을 1년 단위로 재고용하고 있다.
◇양질의 숙련된 노년층 인력, 고용시장서 각광= 이윤 추구가 목적인 기업들이 굳이 고령자들을 직원으로 뽑는 이유는 생산인구가 줄어드는 탓도 있지만, 고령자들이 발휘하는 강점이 기업에 득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임금이 저렴한데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축적된 노하우를 지닌 고령자들은 회사가 큰 부담 없이도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존재다.
미국 보스턴의 바늘 제조 공장인 비타 니들은 고령 직원들의 혜택을 톡톡히 본 경우다. 비타 니들은 과거 미국의 기업들이 인건비가 싼 중국ㆍ인도 등 신흥경제국으로 공장을 이전하던 시절 고령자 직원들을 적극 채용해 인건비를 줄였다. 덕분에 막대한 경비를 들여 공장을 이전하지 않고도 지금까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비타 니들 근로자의 평균 연령은 73세에 달한다.
노동법 전문가인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지만 미국의 경우 장기실업 상태에 놓인 고령자 중에 양질의 숙련된 인력이 많다"면서 "이들이 시장 임금에 연연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나와 기업들로서는 유리한 가격에 협상을 할 여지가 생긴 것"이라고 분석했다.
노년층이 취업 시장에서 각광받는 이유가 단순히 저렴한 임금 때문만은 아니다. 숙련된 기술과 회사에 대한 충성심, 풍부한 경험, 젊은이들의 개인주의 성향과 대비되는 조화력과 주변에 대한 배려심 등은 고용시장에서 고령자들의 주요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일본 맥도날드의 관계자는 "의식적으로 고령자 비중을 늘리는 것은 아니지만 인물 위주로 채용을 하다 보니 고령자 채용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노년층의 취업증가가 젊은이들의 취업을 가로 막는 '회색 천장(gray ceiling)'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박상현 한국고용정보원 직업연구센터 연구원은 "최근의 발표된 연구결과들을 보면 청년층과 노년층의 취업시장이 겹치지 않는다"면서 "이러한 우려는 과장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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