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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카트리나 미학
입력2005-09-12 16:41:41
수정
2005.09.12 16:41:41
채수종 <국제부장>
지난 92년 10월. 미국을 뒤흔든 하나의 소설이 발표됐다. 하퍼 리가 쓴 ‘앵무새 죽이기’다. 이 소설은 미국 사회에서 입에 담으면 안되는 성역인 ‘인종차별’ 문제를 도마 위에 올려놨다.
미국 사회는 한권의 소설로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러웠다. 하퍼 리는 소설을 통해 힘없는 앵무새(흑인 등 유색인종)가 아이들(백인)의 심심풀이 사냥 때문에 죽어야 하는 현실을 고발했다.
'유령의 도시' 된 뉴올리언스
그리고 2005년 9월. 미국에서는 다시 한번 앵무새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사상 유례없는 대재앙을 맞은 미국에서 또 한번의 앵무새 죽이기가 자행된 것이다. 그냥 죽인 것이 아니라 난도질을 쳤다.
카트리나는 미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임을 자부하던 미국이 이처럼 처절하게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집중 피해를 입은 ‘째즈의 도시’ 뉴올리언스는 저주받은 ‘유령의 도시’가 됐다.
카트리나의 공습을 받은 지 열흘이 넘었지만 미 정부는 아직도 정확한 피해를 집계하지 못하고 있다. 각종 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인명피해가 3만명, 재산피해가 3,000억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예상보다 피해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틀림없는 것은 사상 유례없는 재앙이라는 점이다. 미국인들을 정신적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던 4년 전의 9ㆍ11보다도 상처가 깊다.
그러나 카트리나가 낸 상처는 외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측면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카트리나가 미국 사회를 덮고 있던 평등이라는 허울을 한 꺼풀 들춰내자 빈부격차와 인종차별이라는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다음부터는 앵무새 죽이기가 시작됐다.
카트리나의 희생자는 대부분 흑인이었다. 정부의 위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버티던 도시빈민들이었다.
이들은 카트리나로부터 뉴올리언스를 다시 찾을 때까지 각종 편견과 확인되지 않은 괴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1만5,000명이 피신한 슈퍼돔에서의 강간과 살인, 그리고 식량을 구하기 위한 약탈과 방화. 그들은 무법천지의 주인공이 됐다.
백인이 식료품 점에서 나오면 ‘식량확보’지만 흑인이 나오면 ‘약탈’이었다. ‘흑인들이 인육을 먹고 있다’는 소문도 그때 나왔다. 흑인들은 그들의 선조가 아프리카 노예로 미국 땅에 끌려온 뒤 수백년이 지나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수백년을 거슬러올라가 식인종이 되고 말았다.
정말 그랬을까. 알 수 없다. 다만 20세기 아프리카의 한곳을 연상시키는 이곳이 미국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찢겨진 채 처참한 몰골로 걸려 있는 성조기에서 미국임을 확인 할 수 있을 정도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재민들이 흘리는 눈물에서 더 이상 미국을 찾을 수는 없다. ‘우리도 미국인’이라고 절규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공허할 뿐이다.
미 정부는 카트리나의 공습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주검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산 사람을 구조하는 데 집중하던 힘을 죽은 사람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저기에 처참하게 널부러져 있는 주검들이 한쪽으로 치워지면서 카트리나로 인한 상처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머리를 잃고 팔다리만 삐죽하게 드러난 주검들. 부풀어오른 몸뚱아리를 힘겹게 헝겁으로 덮고 있는 주검들. 그들은 말이 없다. 왜 그곳에 그렇게 있어야 하는지….
인종차별 상처 치료 교훈 얻어
올해 미식축구 선수 OJ심슨과 팝 가수 마이클잭슨이 무죄를 선고 받을 때만해도 미국의 ‘앵무새 죽이기’는 끝난 것으로 보였다. 누가 봐도 유죄가 확실했던 그들이 무죄판결을 받은 것은 ‘앵무새 살리기’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에 대한 판결은 미국 사회에서 더 이상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인종차별의 유리벽은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카트리나는 수면 아래 숨겨져 있던 미국의 상처를 다시 건드렸다.
하지만 카트리나는 큰 선물을 주고 갔다. 평등이라는 허울을 들춰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줬다. 앞으로 더 이상 앵무새를 죽이지 않으려면 이번 카트리나의 선물을 잘 보관해야 한다. 카트리나가 만든 상처는 깊었지만 교훈은 더욱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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