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간 '영구적 휴전' 합의 소식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더 이상 악화시켜서는 서로 득될 게 없다는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러시아는 서구권 제재로 인한 심대한 자국 경제 타격에 직면해 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의 전면전 위협에 시달려왔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이 3일 밝힌 두 정상 간 '영구적 휴전' 합의 내용을 놓고 러시아 측은 엇갈린 말을 내놓고 있지만 양측이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의 유혈 충돌을 멈추겠다는 의사에 합의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러시아 크렘린궁 역시 정상 간 대화에서 우크라이나 사태 위기 해결 방안에 상당한 의견 일치를 봤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고 했다.
양측의 합의는 다음날부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들이 영국 웨일스에서 군사 옵션을 포함한 대러 제재 방안을 논의하려던 찰나에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이에 더해 미국·유럽연합(EU)이 금융·에너지 분야를 타깃으로 한 추가 제재를 검토하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로서는 더 이상의 경제적 타격을 막아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지난 3월 크림반도 병합 이후 수차례에 걸쳐 진행된 서구권의 제재로 러시아는 급격한 자본 유출과 주가·환율 폭락, 0%대의 경제성장률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이틀 전만 해도 "마음만 먹으면 2주 안에 우크라이나를 점령할 수 있다"며 노골적인 야욕을 드러냈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 같은 위협을 지렛대 삼아 물밑 협상 과정에서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관철하는 데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흐름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게 지난 1일 열렸던 우크라이나·러시아·유럽안보협력기구(OSCE) 간 다자 실무협상이다. 당시 협상에 참석한 반군 대표는 "우리가 점령한 지역에 광범위한 자율권을 부여하는 조건으로 통합 우크라이나를 유지하는 내용의 평화협상을 진행할 용의가 있다"는 의사를 밝히며 기존의 완전독립 요구에서 물러섰고 이는 러시아의 입김이 전적으로 반영됐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날 있었던 두 정상 간 대화에서도 우크라이나의 연방제를 비롯해 동부 지역에 폭넓은 자율권을 부여하는 방안이 논의됐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렇게 되면 우크라이나에서의 러시아의 영향력을 최대한 강화하고 이를 통해 유럽을 견제하겠다는 푸틴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휴전 합의가 최종 결정될 경우 이는 친러 반군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며 페트로 포로셴코가 군사적 수단으로는 반군을 물리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셈"이라고 평가했다. 러시아로서도 조지아의 압하지야ㆍ남오세티야, 몰도바의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같이 서방 진영 간 경계선을 형성하는 지역에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사실상의 독립 국가 지역을 만들게 됐다는 점에서 지정학적 이득이 크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우크라이나로서도 반군이 기존의 거점인 동부를 넘어 남부 지역까지 전선을 확대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사태 악화를 막을 수 있게 됐다는 이득을 챙겼다. 포로셴코 대통령은 최근 "러시아의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공격으로 (동부) 교전지역의 전세가 급변했다"며 러시아와의 전면전 위협에 대해 토로한 바 있다.
세계 금융시장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정전협상 진전 소식을 반겼다. 그동안 유럽과 러시아 등 관련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투자자들의 신냉전에 대한 경계감이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 증시는 이날 개장과 함께 일제히 상승세를 나타냈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영국 등 주요국 증시는 약 1% 안팎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러시아는 증시와 통화가치가 동반 상승했다. 러시아 루블화는 이날 1.7%나 급등하며 달러당 36.8루블까지 환율이 떨어졌다. 루블화는 최근 우크라이나 동부의 지정학적 위험이 고조되면서 지난달 사상 최저 수준으로 가치가 떨어지기도 했다. 러시아 MICEX지수는 3% 가까이 뛰었으며 RTS지수는 4.5%나 급등했다. 이밖에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 선물도 0.4% 상승했으며 MSCI아시아퍼시픽 지수도 0.7% 상승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지난해 11월 빅토르 야누코비치 당시 대통령이 EU와의 협력협정 체결을 중단하면서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벌어지면서 시작됐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면서 시위가 확대됐고 이는 야누코비치의 축출로 이어졌다. 이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영향력 확대에 위기감을 느낀 러시아가 반발, 이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으로 이어졌다. 지난 4월부터는 동부 도네츠크주ㆍ루간스크주 등지에서 완전한 독립과 러시아로의 병합을 요구하는 분리주의 시위가 발생, 정부군과 반군 간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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