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이 넘어 이제는 외부와 소식이 끊긴 한 노인 재소자. 평소 존재감 없던 이 노인은 신입자가 들어오면 활기를 띠며 자신의 긴 인생사를 자랑스레 늘어놓는다. '내가 말이야'로 시작해 온통 그의 무용담과 미담. 그 방에서 이미 익숙한 이야기는 점점 더 근사한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각색된다. 신영복은 문득 생각한다. 이야기 속 이루지 못한 소망과 지나온 시간에 대한 반성, 그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잘 알려진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가 새 책 '담론'을 내놓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던 27세, 1968년에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20년간 복역했던 그다. 출소 이듬해부터 성공회대에 출강한 그는 2006년 정년 퇴임 이후에도 석좌교수로서 지난해까지 강의를 이어왔다.
이 책은 자신의 글을 발췌한 교재와 당시 강의 녹취록을 기본으로 동양고전을 다룬다. 꼭 10년 전 내놓은 '강의'와 같지만 논의는 깊어졌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강의'에서 '동양고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탐색을 거쳐, 이제 그 두 가지 '사색'과 '강의'가 합쳐져 '담론'이라는 이름의 책"이 됐다고 평가했다.
앞서 재소자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시(詩)에 담긴 진실, 사실을 뛰어넘는 진실을 설명한다. 실제 노인의 삶이 '사실'이고 각색한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느 것이 진짜 노인의 삶이라 말할 수 있는지 묻는다. 오히려 소망과 반성이 있는 진실의 주인공으로 그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 시적인 관점이란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그 자체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인문학·역사·철학(文史哲)의 이성 영역과 책·그림·음악(書畵樂) 같은 감성영역을 나란히 키워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시경·주역·논어·맹자에 한비자 등 동양고전이 텍스트라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들뢰즈와 니체, 예이츠에서 리처드 도킨스까지 철학과 문학, 진화생물학 등을 폭넓게 인용하며 논의를 이어간다.
그의 마지막 강의는 주역에 나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씨 과일을 먹지 않는다)'으로 끝난다. 사람을 소중히 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 개념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입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 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p422~423)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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