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현지시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6,000억달러 규모의 2차 양적완화를 결정한 데는 1930년대 대공황 시절의 쓰라린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미국의 프랭클랜 루스벨트 대통령은 경제가 완전히 공황상태에서 벗어나기도 전인 1937년 통화긴축정책을 펴는 바람에 경제를 다시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벤 버냉키 FRB 의장이 세계 각국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 한 채 돈 풀기에 급급한 것은 대공황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의 소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익히 알려진 미국의 사례처럼, 세계 각국의 경제정책은 지난 역사의 상처에서 비롯된 '트라우마'의 산물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5일 '주요국의 중앙은행, 각자의 트라우마'라는 칼럼을 통해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등 주요국들이 펼치고 있는 경제정책에는 각국이 품고 있는 '트라우마'가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경우 버냉키 의장이 대공황 연구의 전문가라는 점 때문에 '대공황의 악몽'을 강하게 의식하게 된 것으로 풀이됐다. FRB는 거리에 실업자가 넘쳐나던 참담한 대공황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과감한 금융완화 정책을 펼쳤다는 것이다. 버냉키의장은 프린스턴대 경제학교수시절 일본의 디플레이션 위기에 대해 "시장에 충격을 줄 정도로 엄청난 돈을 뿌려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반면 하루 뒤인 4일 통화정책회의에서 출구전략을 의식한 정책기조를 유지하기로 한 유럽중앙은행(ECB)의 경우 1차 대전 이후 독일이 겪은 초(超)인플레이션(하이퍼 인플레이션)이라는 상반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유로권 중심국인 독일이 전후 전쟁배상금을 갚기 위해 돈을 마구 찍어내면서 초래한 극심한 물가상승은 결국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으로 이어지며 독일인들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겼다. 니혼게이자이는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의 완고한 '물가안정'정책의 전통이 ECB로 이어지고 있다며, FRB의 추가 양적완화에도 ECB가 이를 따라가지 않은 것은 독일의 트라우마가 ECB의 정책운영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ECB는 완전고용(성장)과 물가안정이라는 상반된 정책목표로 삼는 FRB와 달리 물가안정을 주요 정책과제로 삼고 있다. 일본 당국의 정책에 드리워진 트라우마는 70년대 엔고의 기억이다. 지난 1971년 미국 닉슨 대통령이 금과 달러의 교환을 정지하는 조치를 취한 이래 엔ㆍ달러환율이 '1달러=360엔'의 고정환율에서 변동환율제로 바뀐 뒤 급격하게 엔고 현상이 나타났다. '닉슨쇼크'라고 불리는 이 사태가 일본경제에 미친 충격은 일본경제의 트라우마가 되어 양적 완화와 시장개입 등의 정책을 끌어내고 있다는 것이 니혼게이자이의 분석이다. 게다가 85년 엔고용인을 골자로 하는 '플라자합의'로 '잃어버린 10년'을 초래한 쓰라린 경험도 있다. 최근 국제사회의 비판을 감수하고 2조엔을 풀어 달러를 사들이는 환율시장 개입도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배경이 깔려있다. 국제사회의 위안화 절상 압력에 맞서는 중국 역시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위안화 대폭 절상을 요구하는 대외 압력에 대해 급격한 위안화 절상에 따른 사회불안을 이유로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중국의 통화정책은 1970년 전후의 문화대혁명과 1989년 천안문 사건 등 사회적인 혼란에 대한 경계감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신문은 해석했다. 신문은 "서로 다른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각국의 정책을 조화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며 "정책 협조는 왜 다른 나라가 그토록 각자의 정책에 집착하는 지 그 이유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용어설명] 트라우마trauma): 외상(外傷)성 스트레스장애. 전쟁이나 천재지변, 사고 등 생명을 위협할정도의 정신적, 신체적 충격을 경험한 뒤 사고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불안해지는 정신적 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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